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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체제의 '정치적인 것'과 포스트-민주화의 '스캔들':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헤게모니 실천과 그 패착에 관하여(초고)
    Articles (draft version) 2022. 3. 16. 21:46
    * 논문이나 기고문을 쓰다보면 애초의 아이디어가 조금 달라지거나 분량을 초과해 최종본에는 삭제판이 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의 작업본이 아쉬우면서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다. 사유의 잔여물, 잉여, 쓰레기일 수도 있지만, '날것' 그대로의 사유실험의 궤적을 그대로 실어볼까 한다. 언제가 내 작업을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적 계보학을 위한 기록으로 남긴다.

     

    *출간본: 김현준. 2021. <문학과 사회 하이픈> 겨울호

     

    1. 들어가며 

      "이제 민주화 운동사도 어느 한쪽의 권력 정당화에 악용될 수 있는 수준까지 한국의 역사가 진전했다." 한 역사학자의 평가다.[1] 이 한 마디가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온 민주화체제의 역설을 정확히 묘사한 것인지 모른다. 민주화 역사의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이 그림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민주화체제가 민주화운동의 수많은 희생의 결과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한 비판을 꺼려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체제의 구성적 속성들 - 예컨대 권위주의와 강한 진영논리 - 때문에 오늘날 또다른 소외와 희생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로지 정권유지를 위해 적대적 공모의 기득권동맹을 획책하면서도 진영논리를 강화하는 전략에 골몰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반은 아닐까? 결국 이 민주화체제에 대한 경직된 정치적 신념이 집권세력의 '정치종교'가 되어 자신들의 정치행위와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 글은 일차적으로 '집권민주화세대•세력'[2]이 기득권정치연합을 통해 구축한 민주화체제의 헤게모니 전략과 그 패착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다. 민주화체제는 보수세력과의 적대적 공모의 동맹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민주/반민주의 헤게모니적 대립구도를 완성•제도화했고, 이 이분법적 거대 양당 구도를 통해 정치의 활력을 유지하고 지지자를 확보했으며 정책들을 집행해 나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이항대립적 정치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커지기 시작했다. 진보 대 보수 프레임으로 작동하던 정치가 잘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 균열의 틈새에서 상이한 정치 감각과 의제를 가진 사회•정치적 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또 이 때문에 균열이 조금씩 더 가속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균열의 전선은 보기에 따라서 희미하게 보일 수도,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87체제의 종언과 새로운 체제의 도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생각은 결론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일단 섣부른 희망을 말하기에 앞서서, 이 글은 민주화체제(기득권정치연합) 진영논리의 극복을 위해, 이 체제의 헤게모니와 그 균열(스캔들)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정치적 패착이 조국 사태(도덕정치 문제)와 권력형 성폭력 문제(미투에 대한 그들의 대응)에서 드러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진보라고 자임하는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정치적 결과물을 진보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그들 '내외부의 적'(미투-페미니즘과 반문반조국파[3] 등)과 맺는 관계와 그들의 정치적 선택들(조국수호와 성폭력 가해자 옹호 등)을 통해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는 곧 이들의 실천적 정치감각(정치하비투스)과 진영논리(정치적 분류체계)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부르디외식으로 보자면, 정치장에서는 현실의 분류원리(분류체계 또는 식별체제)[4]을 둘러싸고 정치세력 간의 상징적 분류투쟁이 벌어진다. 예컨대 세계의 근본 모순을 자본가/노동자 계급적대로 분류하는 맑스주의적 관점도 있고, 남성(가부장)/여성 젠더관계로 분류하는 페미니즘적 관점도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분류원리들과 더불어, 민주화세력과 민주당은 민주/반민주(친일적폐) 분류를, 전통적인 보수우파는 반공/종북 분류를 정치 질서에 강제하려고 투쟁해왔다. 보수우파개신교도 신본주의/인본주의(네오맑시즘•좌파포스트모더니즘•종북게이)과 같은 분류원리를 세속정치질서에 관철시키려 한다. 최근에는 MZ/586 세대론을 통해 한국사회문제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논쟁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87년 이후 한국정치의 지배적인 분류원리와 구별되고 심지어 균열을 내는 정치적 주체들이 들고나온 새로운 분류원리와 정치감각들이 민주화체제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은 민주/반민주 전선을 조국/반조국 전선과 동일시하며 헤게모니 확장을 노렸다. 그러나 이 전선은 지지자 결집 효과만큼이나 저항을 불러왔으며, 이는 곧 헤게모니의 균열 내지 약화를 야기했다. 이 과정에 보여준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전략적 패착 중에 하나는 반조국, 미투, 공정담론 모두를 보수우파•적폐세력의 도덕정치나 성정치로 환원하는 진영논리의 강화였다.

     

      하지만 반조국, 페미니즘, 청년세대의 공정담론 등은 모두 진보/보수 프레임에 잘 들어맞지 않는 정치현상이다. 현 체제(regime)가 당연시해왔던 사회정치적 경계와 범주, 그리고 담론적 의제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균열을 내는 주체와 분류도식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민주화체제가 예견하지 못했던 사태일 수는 있다. 이러한 예견치 못한 이질적인 운동들이나 타자들과의 마주침 또는 새로운 주체, 새로운 정치성, 새로운 정치감각(또는 감성)의 출현을 랑시에르를 따라 '불화'와 '정치적인 것'의 출현, 그리고 '정치적 주체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5] 이 글의 전반부(2장)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의 구분을 시론적으로 도입하여, 민주화체제 헤게모니와 그 균열의 스캔들을 만든 주체 및 정치감각 간의 존재의 자격을 둘러싼 갈등(계쟁)을 소묘할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3장)에서는 스캔들 중에서도 조국 사태에 대한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잘못된 대응이 초래한 그들의 정치적 위기를 도덕(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논할 것이다.

     

    2. 민주화체제의 민주/반민주 헤게모니와 그 균열의 '스캔들'

      민주/반민주 이분법은 적어도 정권의 중심부에 있는 일부 민주화세대•세력에게는 여전히 강고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이분법을 뒷받침하는 정당정치의 선거정치공학은 너무나 선택하기 쉬운 '산수'로 보인다. 한국정치는 마치 기업의 존재목적이 오로지 이윤창출에만 있다는 경제학 교과서의 서술처럼, '정치적인 것'을 오직 정권(재)창출을 위한 정치자본의 지대추구와 이윤극대화로만 인식하고 있다. 어쩌면 정치장의 고유한 논리일지 모르는 정치공학적 정치하비투스는 진영논리라는 강력한 해석틀이자 정치성향을 발휘하여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정치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굴절시킨다.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과점적 정치장 속에서 대의되지 못할 때, 이들의 요구는 기성 정치문법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되거나 정체성 정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청년들의 '공정' 주장과 정치적 시위는 정치장에서 배제된 남성청년과 여성청년들의 '평등' 요구의 재현 양식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능력주의적 공정의 표현 아래에 있는 평등의 요구를 포착해서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일이다. 하지만 기성 정치는 이 공정담론을 남성청년들만의 것으로 여기거나(이대남), 집단이기주의로 손쉽게 치부했다. 조국 자녀의 입시비리(고교생 논문)에 대한 청년들의 비판에 대해서 불공정을 체감하는 청년들의 경험적 맥락 - 즉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통치성 - 을 토론에 부치고 분석하여 의제화•정책화하기보다는 정치적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신자유주의적 공정주의에 빠졌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공정담론이 개혁진보세력 내부의 균열을 획책하기 위한 적폐 프레임이며 여기에 부화뇌동한 사람들을 비난한 것이었다. 이렇게 정권에 대한 비판을 오로지 신자유주의 탓으로만 돌리거나 우파 담론으로만 간주하는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기성정치의 무책임성과 과잉된 이념적 편향성, 진영논리를 증명하는 셈이다(이하에서 밝히겠지만,조국 비판도 무조건 우파의 그것으로 인식하는 진영논리를 볼 수 있다).  

     

      이른바 '랟펨(래디컬 페미니즘)'으로 알려진 '터프(TERF: 트랜스 배제 급진 페미니즘)'도 기성 정치질서의 외부에서 출현하여 그것을 혼동시키고 있다.[6] 터프는 남성정치사회에서 배제된 여성과 여성주의 의제가 대중운동으로 표출된 것일 수 있다. 정체성 정치가 제기하는 문제적 현상들을 무작정 무시하는 것은 이런 목소리, 요구들을 '정치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 또 '경제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정치 외부의 오염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가 요구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이 정치란 정체성 정치를 무조적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또하나의 중요한 정치임을 인식하는 정치이다. 그러나 지금의 기득권정치는 결과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정치의 동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체성 정치의 부정적 차원을 부추기고 있다. 사회적 행위자들의 요구들을 연결하고 확장하여 정체성들을 더 넓은 사회적 연대로 확장함으로써 정체성 정치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해소하기보다는 정권유지•재생산의 정치공학적 효용에 부합여부에 따라 선택적으로 여성의제를 포함시키거나 배제함으로써 여성들의 불만이 '파이싸움'으로 오인되게 만들고 있다. 또 민주당 정권과 그 지지자들은 이른바 '촛불혁명'을 정권교체의 도구로 축소해버렸고, 불평등과 민주사회의 규칙, 지배계급의 정당성, 성폭력, 차별과 혐오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의제화할 계기로 삼기보다는 오로지 검찰개혁(검찰통제)과 정권재창출이라는 좁은 의미의 민주화 프로젝트에만 매달렸다. 

     

      이 결과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조국수호와 검찰개혁을 내세운 문재인 정권의 헤게모니 전략은 조국으로 표상되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혁 요구를 우파에 포섭된 반정치 도덕주의자들의 공모로 매도함으로써 비판적 대중(잠재적 우군)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이를 통해 민주당/반민주당 진영론은 더욱 강화되었다.[7] 민주화세대•세력이 "공공연히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임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적대로서의 정치적인 것은 끊임없이 부상해오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들은 우리 정치에 불화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창출하는 긍정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근 한국정치에 등장한 대안적 분류원리 또는 정치감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기득권동맹의 분류원리에 균열을 내고 있는 계기 또는 '스캔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권력형 성폭력(미투운동 및 페미니즘 리부트)과 전 법무장관 조국 사태(지배계급의 정당성 비판)는 결정적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캔들들은 기존의 진영논리를 의문시하며 기성 정치문법(치안)에 균열을 내는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의 계기들이다. 이는 집권민주화세대•세력과 그 체제가 구축해온 민주주의 감각에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현재로서 이 글에서 제시되는 사례들은 대안적 분류체계 또는 새로운 정치감각이라는 가설을 추론하기 위한 단서일 따름이다.

     

      정치를 인식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은 87체제니, 97체제니 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 갈등과 공모의 정당질서, 그리고 정권의 이념과 정책으로 파악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87체제론은 87년을 기준으로 이전의 구세력과 이후의 신세력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보는 경향만을 지닌채, 90년대 이후 전환의 복잡성은 물론이고 최근의 분류체계를 잘 보여주지 못한다.[9]

     

      주지하다시피 87년 이후 민주화세대의 진보를 자임하는 민주당 정권의 보수적,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정경유착(반노동 친재벌정책)은 좌/우의 프레임 혼동의 원인제공자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이나 적대는 체제 안에서만 인식되어왔고 해결책 역시 체제 내부의 상상력으로 제한되어왔다.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달성한 것으로 간주된 87체제와 97체제를 지나 민주화세력의 정당은 보다 오른쪽으로 이동함으로써 보수우파와의 차별성은 사라지고 말았다.[10] 극소수의 좌파정당과 운동사회, 극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이데올로기조차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장은 평면적이 되었다. 여전히 노동과 인권은 정치장의 외곽에서 고군분투했고, 민주화세력의 정당은 기득권동맹으로서 친재벌 반노동 정책들을 시행하며 한국사회의 보수화와 신자유주의화를 추동했다. 이러한 정치장의 전면적 보수화와 단일성(제도화)은 정치적인 것을 판별하는 정치적 감각을 둔감하게 만들어버렸다. 87체제로도, 민주화운동의 관점으로도, 개혁정당 및 개혁정책의 근거로도 좌우파를 구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독재 대 반독재'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가 민주화체제의 성립으로 약화되자 새로운 대치선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졌다. 조희연은 이를 '포스트민주화'라고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포스트민주화라는 문제설정은 "반독재 민주주의 담론, 민주개혁 민주주의 담론이 이전과 같이 강력한 호소력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포스트민주화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재구성과 혁신•변화가 필요"한 사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포스트민주화 체제의 성격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새로운 현상들-예컨대 일찍이 촛불시위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조직화된 시민운동을 뛰어넘는 대중의 역동성, 기존의 정당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과 이반, 기존의 운동틀로 포괄되지 않는 비조직적이고 무정형적인 새로운 역동성의 출현, '99대 1'로 상징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구별되는 새로운 불평등의 출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명박 정권 이후로 "개인의 반권위주의적 자유와 자율, 공정성에 대한 가치지향이 근저에 존재"하는 "새로운 정치성"이 출현했는데, 이것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는 '탈정치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반독재민주화운동'이라는 양식에 수렴되지 않게 '재정치화'된 것이다.[11]

     

      이런 상황에서 조국 사태와 미투운동 및 '페미니즘 리부트'[12]는 정치적인 것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정치적 감각의 획기적 변동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들, 즉 '스캔들'이다. 이 새로운 인지평가도식에 따라,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은 더더욱 진보라고 평가하기 어려워졌다.

     

      2015년경부터 일어난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는 (이전 여성운동의 저변 위에서) 특별히 우리사회가 더이상 성폭력과 젠더불평등, '남성지배'[13]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컨대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의 미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몇몇 남성 개인의 일탈로 단죄된 것만이 아니라, 성폭력연성규범과 남성연대를 성찰하고 해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여전히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해당 분야의 자율성과 정당성이 훼손되기도 했다. 특히 386 운동권과 시민운동 출신 유력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이에 대한 입장과 태도에 따라 진보진영과 시민사회 내부에서 편을 가르는 계기로 작용했다.

     

     최근의 흐름은 보다 급변할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양상을 보인다. 여성들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임금격차, 유리천장과 같은 불평등으로 경험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표어가 함축했듯이, 가정 내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연인관계 내의 성폭력과 같은 사적이고 일상적 영역에서 체감되는 것으로 존재해왔다. (물론 이러한 성차별 경험과 페미니즘 언어가 이전부터 존재해왔음에도) 이 정치적 감각은 최근 들어 '페미니즘 리부트'나 '급진적 페미니즘'의 언어를 입고 대중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것을 세대 갈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흐름도 강해졌다. 심지어 공통된 세대경험의 기반 위에서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적대적 진영논리와 세대론 모두 기각함으로써 중도층의 새로운 정치논리를 탐색하는 입장도 출현했다. 이렇듯 87체제 이후, 정치적인 것을 상이한 방식으로 파악하는 정치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출현해오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체제의 안감(lining)인 민주화세대의 정치적 감각은 이러한 새로운 감각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2019~20년 전 법무장관 조국 사태는 또 한번의 분기점이 되었다. 범진보진영은 조국수호와 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서초동 촛불'과 이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조국수호에 앞장선 지식인들은 조국수호와 검찰개혁이 계급정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14] '서초동'의 정치는 검찰개혁이라는 문재인 정권의 의제를 역사적 민주화와 진보정치의 당위, '촛불혁명'의 요구로 전치시키는 무대였다. 반면 비판자들은 진보정치를 민주당의 검찰개혁 의제로 환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초동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수호에 동의하지 않고 검찰개혁만을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에 현 민주당 정권의 중심에 있는 민주화세대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결합하면서 정치, 공정성, 교육불평등을 진영논리를 넘어서 보는 시각과 집단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3. 문제는 도덕정치인가사회적•도덕적 헤게모니인가 

     

      그렇다면 앞서 서술한 역사적 국면들과 더불어 중도개혁•민주화체제•세대•세력의 헤게모니 전략이 위기에 처한 본질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하에서는 문재인 정권의 중도개혁정치가 좌초된 중요한 원인을 보수우파세력이 파놓은 함정인 조국에 대한 '도덕정치' 프레임에서 찾는 입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이 위기의 본질을 찾고 정치와 헤게모니에서 '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논하고자 한다.  

     

      조국수호와 검찰개혁을 동시에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민주화 이후 중도개혁 정권에 대한 기대의 좌절로 인해 도덕적 비난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도덕적 비난을 통해 정당성을 훼손하고자 하는 도덕적 순결주의의 '도덕적 단죄 정치'가 정치공론장에 확대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현재 국면은 보수우파가 '조국과 386세대 죽이기'를 통해 진보좌파를 죽이려는 도덕정치의 국면이다. 이러한 보수우파의 음모가 보수세력의 확대를 위한 보수언론과 보수검찰의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진보좌파 지식인들까지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보수세력의 도덕정치의 덫에 빠져 반대파에게 동조하고 그들의 권력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사회학자는 이렇게 조국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도덕정치에 빠진 지식인들이 대중들과 비판적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도덕적 우월감과 지식인의 권위에 빠져 지배권력이나 공정담론을 분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형 성추행 논란에서는 성 정치의 악용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을 보여주지 못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저널리스트적 개입을 했다고 비판했다.[15]

     

      도덕정치가 한국정치의 문제점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노무현과 노회찬을 잃은 트라우마를 고려하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더이상 보수우파에 의한 도덕정치의 희생양을 만들지 않겠다는 정치적 책임감과 부채감의 발로일 수 있다.[16] 또 도덕적 비난이 진보에게만 적용되는 듯 하니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우파가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진보좌파에게만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게 적용되는) 도덕정치의 문제점으로 등치시켜서는 곤란하다. 진보좌파 역시 특권과 특혜, 지배정당성을 비판하기 위해 보수우파에 대한 도덕성 검증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해 오지 않았나. 그러다가 진보좌파 인사가 도덕성 문제에 연루될 때마다 도덕정치가 한국정치에서 극복해야할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수우파인사의 도덕정치 에 대해 진보는 이를 비판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영논리 아닐까? 조국의 도덕성 논란은 민주세력 역시 스스로 강조해온 도덕적 정당성의 원칙이 작용한 (긍정적)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국에 대한 비판이나 조국이 상징하는 특권에 대한 불만을 개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 도덕정치라고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되려 정치를 도덕화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도덕정치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조국 비판 지식인을 향한 것이지만 사실상 보수우파에 동조하는 대중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조국의 문제는 단순히 도덕 스캔들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정당성 스캔들이다. 그말이 그말 아닌가? 맞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말할 때 개인 윤리로 축소되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 '지배의 정당성'이라고 바꿔 표현한 것이다. 즉 정치 한복판에서 제기되는 도덕이란 탈정치적 개인윤리가 아니라,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정치장, 더 크게는 메타권력장(국가)의 상징자본(상징권력)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도덕 언어를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인식하며 상징권력의 크기를 가늠한다. 도덕 언어로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평등한 정치구조 안에 있는 정치적 행위자들의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위치와 적은 권력에서 나오는 감각적 불만인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비난은 그저 도덕적 비난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불평등을 감각하는 대중의 정치적 소외와 항의의 목소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라는 '스피커'를 과점한 민주화세대의 입장에서는 조국 정국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계급적 불만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국에서 엘리트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어떻게 정치에 대한 합당한 문제제기로서 의제화될 수 있는가? 물론 후자에 대한 보수언론의 '번역'은 전자의 정치에 대한 자기정당성을 강화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민주당과 그 지지세력은 전자만을 주어진 결과론적 정답으로 이상화하는 반면, 후자는 한국민주화와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지로 간주한다. 집권민주화세대•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이러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민주화의 완성과 계급투쟁, 민주당 집권을 동일시하며 사실상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의 앞에서 검찰개혁과 조국수호가 우선적인 정치전략으로 채택된 것이다. 조국 사태를 대하는 민주당의 정치에는 조국의 고통과 검찰에 대한 분노만이 정당한 정치성 이성으로 할당되고 인정될 뿐, 그 외의 정치적 요구들은 정치적 이성으로 인정되지 않고, 원한감정이나 도덕감정(도덕정치)으로 치부된다. 이렇게 정치 장의 기존 권력지형은 사회부조리나 고통에 대한 감각에 대한 인지를 불평등하게 배분한다. 

     

      게다가 조국을 지지하며 조국비판을 도덕정치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이 사태가 단지 국가와 법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에 관한 것이라는 점도 간과한다.모든 사태를 정권획득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정권의 정당성이 도덕적 연대와 같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기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조국의 행위는 도덕적 연대성이나 사회적 신뢰와 같은 사회적인 것을 파괴한 행위이다. 그리고 조국수호는 팬덤정치[17]만을 강화하고 헤게모니 구축에는 실패한 전략이다. 따라서 조국 사태는 어떻게 자기폐쇄적인 진영논리의 팬덤정치를 극복하고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지, 정치적인 것의 문제가 어떻게 사회적인 것을 통과해야하는 것인지, 또는 어떻게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함께 구축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사건인 것이다. 

     

      조국의 도덕성 논란은 민주당을 위시한 소위 '범진보' 자유주의 정치세력 역시 도덕성을 포함하는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감시와 심판에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헤게모니' 개념의 정의 자체가 함의하고 있듯이, 도덕적 정당성과 설득력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한국사회에 구축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닐까? 이러한 대중정서(또는 국민감정)가 확립되는 역사적 과정에 보수언론의 획책과 우파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 문제를 진영논리로 회피 또는 돌파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그저 상대방의 정략적 음모로만 여기는 정치공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지배정당성의 위기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도덕적 비난이 아닌 방식으로 지배계급의 특권이 문제제기 되어야 한다는 정론(正論)은 도덕의 문제를 사회•계급•지배문제로 번역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 즉 집권여당 정치인들이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 도덕의 언어를 보수언론이 반개혁 프레임으로 번역하고 있다면, 집권개혁세력(정당과 조국수호 지식인)이 해야할 일은 반개혁 프레임을 반대하기 위해 도덕의 언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언어를 개혁 프레임으로 번역하는 일일 것이다. 보수 프레임의 반대가 곧장 진보 프레임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집권개혁세력이 보수 프레임의 반프레임만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저들의 프레임을 강화시켜주는 일이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이것이 프레임 이론이다. 기존 프레임을 같은 선상의 대립 프레임으로는 넘어설 수 없다. 기존 프레임을 넘어서려면 전혀 다른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을 외면하는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도덕(요구)을 민주적으로 수용하여 정치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도덕성의 담론을 무시해온 비판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며 도덕적 헤게모니와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한 홀의 말을 들어보자.

    헤게모니는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다양한 장 위에서 주도적 위치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성의 담론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무시되어온 영역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식, 대중적 의식, 그리고 실천적 사고의 공간을 장악하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든지 도덕의 영역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정치적 계산을 바로 도덕의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좌파는 '선'과 '악'의 차이가 정의되는 공간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언어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공간은 종교적•도덕적 기업가들이나 교회와 도덕적 다수파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지게 됩니다. 그람시에게 (사회적•정치적•지적 판단뿐 아니라) 도덕적 판단들 -자신들의 용어와 언어, 일상생활에서 - 계산하는 필수적 능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예컨대, 좌파)이 자신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전선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헤게모니 정치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문화의 장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18]

      도덕정치의 문제를 재고하는데 아도르노(버틀러)의 사유도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도덕철학의 문제>에서 그릇된 삶에서 올바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올바른 삶을 추구하려면 그릇된 삶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19] 

    이 세계가 우리에게서 만들어낸 것에 대한 저항은 단지 우리가 온전히 저항할 자격이 있다는 이유에서 외부 세계에 대항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 덧붙여 우리는 그 세계에 가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우리의 일부분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저항의 권력을 동원해야 하기도 한다.[20] 

    모든 사람이 부조리를 저지르고 공모하는 사회에서 특정인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너 혼자만 깨끗하냐? 혼자 잘났냐?"와 같은 비난을 듣기 쉽상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그것이 비판하는 자의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함께 만들어낸 부조리한 세계에 결부된 자기자신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그저 정치와 배타적으로 분리되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오늘날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건 세계를 조직하는 문제로 융합된다 ... 그런 올바른 정치 형태가 오늘날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영역 안에 놓여 있다면, 심지어 우리는 올바른 삶에 대한 추구가 곧 올바른 정치 형태에 대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1] 

    올바른 삶은 올바른 사회적 조건 및 정치적 형태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올바른 삶의 문제를 현실정치에서 사적인 도덕으로 축소하는 것은 올바른 삶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정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올바른 삶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4. 나오며기득권정치연합 진영논리의 극복을 위한 제언 

      87체제와 그 성취의 끝자락에 있는 민주당의 정치는 자신의 민주/반민주 이데올로기를 교란하는 다양한 식별체제들을 억압하는 치안으로서의 정치가 되고 말았는지 모른다. 이들의 진영논리는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치안의 논리를 보여준다. 이것의 예시로서 이 글은 집권민주화세대•세력에 의해 권력형 성폭력(미투)과 조국 사태라는 각각의 국면에서 두 가지 진영논리가 등장하는 것을 보였다. 하나는 "성 정치의 악용"이라는 진영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의 악용(도덕정치)"이라는 진영논리이다. 이런 진영논리(구시대적 분할선)는 여전히 다른 영역들에서도 일정하게 관철되며 경우에 따라 상대적 자율성을 띠고 부분적으로 변용되기도 한다. 권력형 성폭력 앞에서도 맹목적으로 같은 진영의 정치인 가해자를 옹호하고, 명백한 범죄사안 앞에서도 반대 진영에 빌미를 주기 싫어서 수호하는 행위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체제를 신성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은 '정치종교'의 사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불화와 정치적인 것이 끊임없이 출현하고 정치적 주체화가 발생한다. "정치는 언제나 중단, 개입, 혹은 효력을 수반한다.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정치는 무언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22] 그럼에도/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이 불화와 정치적인 것의 출현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자신을 바꾸는 동력으로서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의 새판짜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과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논란과 논쟁)을 회피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 정치적 주체화와 정치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물론 탈진실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공포와 우려가 항존하겠지만, 미투운동과 조국 사태에서 보듯이, 위력과 성폭력연성규범 등을 성찰하는 일상의 정치와 도덕적 연대라는 '사회적인 것'을 재구축함으로써 정치의 기반을 강화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크게 두 세 가지의 흐름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장을 새롭게 분할하고 재편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페미니즘과 성폭력•성차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진보/보수를 떠나 정치성을 구성하고 주도권을 갖는 가장 중요한 실천논리가 되고 있다. 진보는 페미니즘을 일상의 정치와 소수자 정치에서 강화•확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보수는 문화전쟁론이나 신냉전적 관점을 취하는 보수우익 개신교인들과 함께 반퀴어•안티페미니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세대 간 불평등을 세대 내 불평등과 계급문제로 설득력있게 매개하는 작업에 성공한다면 진보좌파의 세력이 강해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보수우파에게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 또한 다양한 사회적 고통들과 불만, 요구들을 도덕주의로 비난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진보적 실천으로 전화시키는 운동의 성공이 진보/보수를 새롭게 구별하고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관건이 될 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헤게모니의 실제적 형태가 생성되는 것은 오직 다양한 집단이 부침을 거듭하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투쟁을 통해서"이다.[23]

     

      조희연은 새로운 정치성을 담지하는 다양한 민주적 투쟁들을 접합시키는 운동전략을 제안한 바 있다. "포스트민주화 시대에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를 이러한 새로운 정치성을 해결하는 담론으로 급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화세력의 독과점 정당인 민주당 정권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소수자 및 여성 인권이나 페미니즘 의제로 제기되는 새로운 정치성을 접합시키기는커녕 민주주의의 확장(=민주당 영구집권)이라는 대의를 내세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최근 조희연은 87민주화체제와 이것의 '평등프로젝트'가 '전환적 위기'와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2030세대가 제기하는 "'더 높은 절차적 공정'과 '더 높은 기회의 공정'에 대한 '절규'까지도 포용해내는, 한 단계 높은 '평등프로젝트'"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24] 결국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의 등장을 기득권 동맹의 양당체제를 넘어서 민주화의 가치와 의미, 주체들의 연대와 정치적 전선을 새롭게 구축하는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주장이다.

     

      젠더불평등 경험과 페미니즘에 고무된 여성들의 활동이 진영논리에 제약받지 않고서 여러 영역에서 연대를 확장해 나가며 민주주의의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고[25], 기득권동맹에 포섭되지 않은 다양한 소수자 인권운동들이 '성문화된 권리들의 기제형식'으로 재확인하며 '보편성의 정치'를 발전시키고 있다.[26]

     

      이런 의미에서 성평등과 인권, 노동의제를 의회정치 바깥에서 주장하는 운동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가치와 의제를 우선적인 정치의제로 선제적으로 수용하여 보편적인 의미를 발명하며 사회적 연대와 '물질성'을 창출하지 않으려는 정치세력은 과거의 민주화 공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감하게 비토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소수자/여성 혐오세력 및 극우개신교가 발흥하고 나아가 이들이 반공주의-반반퀴어-반차별금지법동맹을 형성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인권을 도덕적 선호의 문제로 치부하고 '사회적 합의'를 내세워 정작 사회적 연대를 창출하는 정치의 역할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홀의 지적처럼, 정치가 도덕성의 언어 구축을 포기할 때, 이 빈공간을 종교와 도덕적 다수파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새삼 재차 강조해야할 것은 '합의'가 아니라, 배제된 사람들의 '반목(불화)'을 통한 대안적인 민주적 정치•문화•사회세력들의 재조직화인 것이다.[27]

     

      민주화세력은 중도개혁•자유주의정권을 중심으로 헤게모니지배블록을 구축하는 실천만을 정답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미 이 세력이 수구정치권력과 자본주의경제권력을 포함하는 기득권정치연합에 포섭되었다는 사실, 즉 사실상 민주당이 민주국가를 위한 '우리의 블록'이 아니라, '저들의 블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함으로써 실수 아닌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타협의 방향이 항상 민주당만을 향해 온 것은 여전히 '수동혁명'의 이미지가 우리의 정치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87체제는 권력 상실 위기에 처한 보수세력이 민주화세력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며 타협한 헤게모니 블럭이다. 하지만 지금 기득권동맹으로 흡수된 민주당•자유주의세력은 보다 왼쪽에서 제기되는 개혁요구들과 '타협'하여 헤게모니를 확장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이제는 민주화체제를 넘어서는 역사적 헤게모니블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기득권정치연합의 반대방향에서 고민하자. 87체제의 진영논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슈미트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적과 아군을 규정하고 새로운 진영에 대한 탐색과 사유가 필요할 때다. 다른 선택지는 가능하다.


     

    [1] 김성보, 2021.9.2. "역사, 한국의 '시민종교'에 대한 반성",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74979&fbclid=IwAR0IkA_bpIo41FfDEHVwNYajxPIoXPRHB8PTWm-lCsXPnBBQZdlEnHjXxfE

    [2] 민주당 집권세력이 된 민주화세대를 '집권민주화세대•세력'으로, 민주당에 흡수되지 않은 다양한 정치적 행위자들을 포괄적으로 '비집권민주화세대•세력'로 명명했다.

    [3] 여기서 굳이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적을 '국민의 힘'이 아니라, '반문(재인)반조국파'이라고 쓴 이유는 미투와 조국 국면에서 모두 중도층 뿐만 아니라, 민주당 지지세력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조국수호에 동의하지 않는 비집권민주화세력까지 정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4] 진보주의나 보수주의는 내용적 이념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에토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정치사상사는 정치적 이념들의 역사적 근거들과 내용적 일관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글의 주목적은 주어진 정치적 이념들이 한국정치를 결정하는 양상보다는 최근 한국정치의 진보/보수를 구성하는 새로운 양상이나 전선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베버적 관점에서 에토스란 도덕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실용적 관계에서 자극하는 실천적 습속 또는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분류체계 또는 인지평가도식(하비투스)이다. 이를 '정치적 감각의 식별체제'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이른바 진보주의나 보수주의는 단순히 선험적으로 결정된 이데올로기적 당위 규범이나 도덕적 내용이라기보다는 오랜 정치적 대립 구조 하에서 정치적 실천에 유용한 것으로서 학습된, 또는 효용을 인정받은 정치양식이다. 정치적 이념이 사실상 일종의 정치적 양식이라는 것은 규범이나 구체적인 정책, 심지어 도덕적 내용은 얼마든지 수행적으로 정합적인 것으로서 재조합되거나 대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명명된 정치적 이념들은 역사적 국면과 상황 속에서 동원과 자본 획득에 유리한 다양하고도 심지어 모순된 정치 전략들을 선택하고 접합하여 적절하게 구사해내는 실천감각이자, 이 감각의 침전물이다. 물론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정치 공간 내에서 구별되는 우연적인 정치적 선택들의 조합 패턴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주의 역사학자 하우프트의 말을 인용하며 이러한 정치적 이념들이 관계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주의'의 개념들은 대개 정세와 연계되어 있고, 성급한 일반화로 얼룩져 있으며, 신랄한 논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개념들은 불일치 속에서, 다양한 흐름의 대표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예를 들자면, 양차대전 시기에 진보좌파는 과학을 숭배했던 반면, 보수우파는 자연숭배에 빠졌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반대로 진보좌파가 자연생태학을, 보수우파가 기술숭배와 기술관료제에 빠지는 방식의 자리바꿈이 일어났다. 부르디외, 2014,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역, 나남, 217쪽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은 진보적인가?

    [5] 진태원에 따르면, 랑시에르는 주체화나 치안 개념의 형식적 본질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발현되는 방식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개념들이 다소나마 한국의 민주화 및 포스트-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고 본다. 진태원, 2015,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63호, 211쪽 참조.

    [6] '터프'는 1960년대 급진 페미니즘을 왜곡된 방식으로 모방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보명, 2020, "급진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 <문화/과학>, 104호, 73-91 참조.

    [7] 이승원, 2020,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집회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과제", <황해문화>, 봄, 참조.

    [8] 이광일, 2017, "그들이 대중을 다루는 아주 오래된 방식: 촛불은 보수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넘을 수 있을까", <문화/과학>, 89호, 186쪽.

    [9] 백승욱, 2021, "되돌아보는 1991년: ‘87 정세의 자유주의적 포섭 시도’와 잊힌 퇴조의 출발점", <경제와사회>, 42쪽.

    [10] 87년 체제의 핵심은 "기성정당이 중심이 된 보수독점적 엘리트 카르텔의 구조가 복원되었다는 것"이다..박상훈, 2009, 206쪽.

    [11] 조희연, 2012.5.15. "'포스트민주화'와 '제3의 정치성'을 말하자", <시민사회신문>, http://www.ingo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9757

    조희연은 87년 체제를 '민주주의 헤게모니 블록'이 '반독재 자유주의(liberal)의 주도권'과 구 지배블록의 주도권의 "타협적 경로"로 전개된 '수동혁명적 민주화체제'로 규정하면서도 이러한 수동혁명 내에 아래로부터의 '능동성' 또는 '능동혁명'의 존재에 주목했다. 87년의 민주화라는 수동혁명은 "전개됨에 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균열선을 보이며 역동적인 '구성적 각축' 과정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진보 프레임으로 포착되지 않는 정치적 요구들은 민주화세력이나 집권당이 예상치 못했던 균열의 사례일 수 있다. 그는 또 87년 민주화 이후 정형화된 정치의 거대한 변화를 분석하고자, 87년 이전의 역동성으로부터 87년을 분석하지 않고, 87년 이후의 역동성으로부터 87년을 분석한다고 주장하고, 87년 이후의 시기구분을 네 경합국면으로 분석했는데, 특히 제 4경합국면(이명박-박근혜 정권)인 포스트민주화체제는 '독재 대 반독재' '(민주)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화 주변화되고 새로운 대치선을 둘러싼 각축의 시기"로 정의했다. 이러한 관점을 이어가자면, 이 글은 포스트민주화 시대 '구성적 각축'의 급진화를 논하고 있기에 어쩌면 이를 "포스트-포스트민주화체제"라고 재규정하는 작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조희연, 2013, "'수동혁명적 민주화 체제'로서의 87년 체제, 복합적 모순, 균열, 전환에 대하여: 87년 체제, 97년 체제, 포스트민주화체제",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통권 24호, 137-71쪽 참조.  

    [12] 손희정, 2017,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나무연필.

    [13] 부르디외, 2000, <남성지배>, 김용숙 역, 동문선.

    [14] 김현준, 2020, "86세대 지식인의 계급투쟁: 대리 정치와 표상의 독점", <문화/과학>, 102호 참조. 87체제 이후 기득권동맹을, 남미 민주화 과정을 분석한 애브리처(Averizer)를 따라, 정치를 제도정치로 축소시켜 기득권과 운동사회의 교착국면을 형성하는 "민주적 엘리트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하승우, 2017, "87년 체제 바깥으로의 탈출은 가능할까?", <오늘의 문예비평>, 86쪽 참조.

    [15] 조국 국면에서 민주화세대가 도덕정치를 비판하는 와중에 "성 정치의 악용"을 우려하는 것은 역시나 진영논리의 궁극을 보여준다. 많은 '진보 남성'들이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정치적 선택을 공공연히 수행했다. 심지어 안티페미니즘을 기조로 활동하는 진보정당 내 정파도 존재한다. 이러한 정치적 행동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정치지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정치(세력)에 대한 비토, 즉 정치혐오에 빠지게 하기 쉽다. 그럼에도 다행히 정치혐오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까닭은 정당체제 바깥의 페미니즘 운동이 대안적 관점과 실천을 제공해주는 정치를 활성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가령 성폭력을 이유로 진보진영에 대한 지지의 철회를 성정치에 대한 순진함으로 매도하거나 여당인사의 위선과 불법 때문에 여당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단순히 도덕정치라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인가?

    [16]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리더십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문재인 정권의 도덕적 설득력으로서의 헤게모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도덕성에 대한 의도적 무시는 문재인 정권과 이를 둘러싼 집권민주화세대•세력의 실패한 문화정치를 보여준다. 이 사태는 여러 정치구성체들이 헤게모니를 구축할 능력이 없이도 통치해왔다는 홀의 통찰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홀, 2021, <문화연구 1983: 이론의 역사에 관한 8개 강의>, 김용규 역, 현실문화, 290쪽 참조. 

    [17] 어떤 지식인들은 조국을 고난받는 메시야(예수)나 홀로코스트의 유태인에 비유했다.

    [18] 홀, 2021, <문화연구 1983: 이론의 역사에 관한 8개 강의>, 김용규 역, 현실문화, 296쪽.

    [19] 버틀러,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 양효실 역, 창비, 302쪽 재인용.

    [20] 버틀러,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 양효실 역, 창비, 304쪽 재인용.

    [21] 버틀러,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 양효실 역, 창비, 278-79쪽 재인용.

    [22][22] 체임버스, 2019, <랑시에르의 교훈>, 김성준 역, 그린비, 110쪽. 랑시에르의 정치철학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긴장이 있고, 이에 대한 비판적 논점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가 랑시에르적 '정치'에 부합하는 사례일 수 있다고 보았다. 위 책을 참조하라. 

    [23] 홀, 2021, <문화연구 1983: 이론의 역사에 관한 8개 강의>, 김용규 역, 현실문화, 298쪽.

    [24] 조희연, 2021.7.21. "'87민주화체제' 넘어서는 새로운 '평등프로젝트'가 필요하다",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2109144086314

    [25] "확장하는 페미니즘(stretching feminism)" 또는 "확장적 페미니즘(stretchy feminism)"은 바로 이런 흐름의 이론적 소묘이자 실천적 제안이다. <문화/과학> 104호, 특집 확장하는 페미니즘 참조

    [26] 이는 랑시에르적인 의미에서 인권운동의 이론적 논리, 인권의 정치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정정훈, 2014, <인권과 인권들>, 4장; 박기순, 2016,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3): 자크 랑시에르", <월간 좌파> 34호, 128-144 참조.

    [27] 랑시에르에게 조직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지는 회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안에 대한 투쟁, 치안 안에서 하는 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상운은 랑시에르에게 제도화나 조직화가 없다고 불평하는 대신 제도화나 조직화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게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김상운, 2012, "반란과 해방의 정치: 바디우와 랑시에르를 중심으로", <실천문학>, 8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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