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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세대' 지식인의 계급투쟁: 계급 없는 계급정치, 민중을 위한 대리정치, 민주주의 표상의 독점 3/3(부르디외의 정치학)
    Articles (draft version) 2022. 3. 16. 21:18
    * 논문이나 기고문을 쓰다보면 애초의 아이디어가 조금 달라지거나 분량을 초과해 최종본에는 삭제판이 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의 작업본이 아쉬우면서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다. 사유의 잔여물, 잉여, 쓰레기일 수도 있지만, '날것' 그대로의 사유실험의 궤적을 그대로 실어볼까 한다. 언제가 내 작업을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적 계보학을 위한 기록으로 남긴다.

     

    ** 출간본: 2020. 86세대 지식인의 계급투쟁: 대리 정치와 표상의 독점.  <문화/과학>, 102,  50-77. 

     

    부르디외는 대표/대리자가 어떻게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 대중의 정치적 소외와 대표자의 정치적 물신주의를 설명한 바 있다. 

    겉보기에는 집단이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 같지만 ... 실제로는 대변인이 집단을 만든다 ... 대표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표되고 상징되는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고, 대표를 한 집단의 대표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순환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대변인이 자기 원인[causa sui; cause of itself]으로 나타나며 스스로에게 나타낼 수 있게 하는 환상의 뿌리를 발견한다. 대변인은 그의 권력을 생산하는 것[집단]의 원인 이다.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집단은, 그가 그 집단을 구현하기 위해 거기 있지 않다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110

      86세대가 87체제와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제도적 정치권력을 획득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상징적 조건(또는 부과)인 근본적인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사회구성체의 주인, 즉 사회를 구성해나가는 능동적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 사실상 민주정권 - 라는 87체제의 상징적 표상은 권력의 기호가 되었다. 

     

    ‘운동’의 구성이 집단의 구성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기호가 지시된 대상을 만든다. 기표는 기의와 동일시된다. 후자는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전자로 환원된다. 기표는 표시된 집단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것만이 아니다. 표시된 집단에게 존재하도록 통고(signifier)하는 것, 표시된 집단을 동원하면서, 가시적으로 존재하도록 불러오는 권력을 가진 것이 바로 기표이다. 기표는 특정한 조건에서, 위임에 의해 부여된 권력을 사용하여, 집단을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111

     

      그 정당성은 바로 민중과 민중의 열망(민주주의)을 대리하고 있다는, 대리해야만한다는 신분적 의식에 있다. 오랜 운동기간과 민주화과정, 그리고 심지어 정권획득을 통해 형성된 대리의 성향은 사회적 자의식(하비투스)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86세대는 대리되는 사람들을 사회에 내보여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대표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민중을 재현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대표자로 재현한 것이다. 어느 86세대 혹자는 과거를 반추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자기보다는 우리, 사회, 나아가 국가에 대한 생각이 먼저라고 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더 지배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하나의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에 가장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세대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가장 주축인 386세대야말로 이 시대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는 점이죠. 이런 것을 통해 386세대가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이후의 세대에 어떤 모범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구요.112

      부르디외에 따르면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으려면 수임인은 자신의 인격을 집단에 바치면서 자신들이 집단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113 86세대는 언제나 자신들을 대의에 복무하는 무사무욕적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사명을 부여했다. 신성을 중개하는 성직자와 같이 그들은 스스로에게 신성한 과업을 할당했다.114 니체가 말했듯이, 위임받은 자들은 보편적 가치들을 자기들에게 귀착시키고 전유한다. 그리고 그들은 도덕을 징발 하며 신, 진리, 지혜, 민족, 신탁, 자유 등의 관념을 독차지한다.115 부르디외에 따르면, 

    성직자는 신 또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스스로 신이나 민중이 된다. 나는 무가 될 때 - 이는 내가 무가 될 수 있기 때문, 즉 나를 말소하고, 나를 잊고, 나를 희생하고, 나를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전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신 또는 민중의 수임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전부의 이름으로 말하며, 그런 고로 나는 전부이다.116 

     86세대는 민중(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소환’117하고 대리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했고 그러한 정당성에 기반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정당성은 단지 실물적 정치권력의 획득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권력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에 만드는 정치적 장(게임)의 환상을 사회체제에 깊이 각인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규범으로 작동하는 환상이 바로 민주/반민주 표상이다. 다시 말해 86세대는 민주주의 게임 규칙의 입법자가 된 것이다. 86운동권을 존재하게 만든 것은 민중(운동)이었지만, 86운동권은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호명함으로서 민중의 정치적 욕망을 대리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민중의 현시, 민주주의의 화신(incarnation)이 되었다. 86세대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논쟁적 국면마다 체계적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이 민중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대리의 권력을 전유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민중・민주・진보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반복하면서 ‘복화술’을 체득한 86세대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86세대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관심은 그들이 대리한다고 믿는 공언된 민주적 표상과 민주당의 이해관심 뒤로 숨어버린 채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118은 민주화의 시간적 궤적 속에서 완전히 탕감받게 되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말했듯이, 교회의 봉사(ministerium)를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지배(imperium)로 변형한다.119 민중과 국가를 위한다는 그들의 희생적인 태도와 겸허함, 죄의식과 부채의식의 공연은 위치의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긴장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위치와 월권행위를 은폐하는 구조적 자기기만이자 완곡어법이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의 서사조차도 86세대의 정치적 정당성과 자기정체감을 강화하는 것이다. “대리의 신비는 종복이 자신은 그저 종복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월권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지배를 은폐한다는 조건에서만 작동한다.”120  물론 이 객관적, 주관적인 간극이 변혁운동의 실천적 동력인 것도 사실이다.

     

     

    이론적 계급에서 동원된 계급으로.

     

    86세대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어떻게 동원되었는가?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은 동원이라는 정치적 노동과 투쟁을 통해서 ‘실현된 계급(the relaized class)’이다.121 이 투쟁은 사회세계에 대한 특정한 전망과 정치적 입장을 한국사회와 정치의 근본적 규칙으로 강제함으로써 특정한 사회계급과 계급연대를 구성해낸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상정된 민주적인 개혁법안들은 파기되거나 개악되었으며, 6월 항쟁이 신화화되는 이면에서 1980년대 사회운동의 혁명성은 거세되었다.122 한상진은 중민이 지향하는 변혁노선을 “점진적 개혁”으로 규정했다.123  

     

    사실상 ‘86세대’라는 정치적 이름은 계급을 계급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의 계급적 현상인 것이다.   86세대는 정치적(경제적・교육적) 투쟁과정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나 존재했던 중민을 현실화해내었다. 특히 서초동 집회는 검찰개혁과 평등요구를 조국 수호 대 반대로, 성(대의)/속(도덕주의), 민주 대 반민주로 이원화하고 후자를 오염시킴으로써 전자에 동참했던 86세대를 하나의 사회계급처럼 존재하게 만든 사건이다. 

     

      계급 뿐만 아니라 세대 역시 정치적 투쟁에 따른 사회구조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각 세대는 자기세대의 집합정체성과 상징적 능력을 활용함으로써 계급을 재생산해낸다. 현재 상황에서 자신들의 ‘상승지향’ 하비투스 또는 ‘상향이동의식’을 발현시켜 한국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계급투쟁 국면에서 승리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구집단이 바로 86세대인 것이다. 즉 민주화의 독점적 표상으로서 86세대는 중민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계급투쟁이 계급을 규정한다.’124 계급투쟁이 계급범주를 구성한다. 계급투쟁이란 이 계급범주의 분류와 정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지금까지 86세대는 자신들을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정의하는 투쟁에서 대략적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되었다.125 

     

      조국 사태 국면에서, 조국을 수호하는 상징생산의 권위자들인 지식인들을 통해서 ‘87년체제’가 86세대 (남성)엘리트의 민주/반민주 표상의 체제이자 86세대의 상징적 권력을 재생산하는 민주당 체제임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제기한 것이지만,126 ‘87년체제’는 단순한 민주화(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이자 계층상승을 위한 ‘교육경쟁체제’로서 86세대의 계급투쟁을 조건지은 제도적, 합법적 토대인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상상한 민주화는 86세대가 상상한 민주화와는 다른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87년 체제 이후 현재의 정치지형과 구조는 86세대 계급투쟁의 결과이자 계급재생산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촛불’이 “한국의 지배동맹”과 “체제자체”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실질적인 사회개혁을 구동하지 못”한127 까닭이 항상 민중을 대리(해야)한다고 믿으면서도 계층상승의 열망과 지배동맹 - 한상진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권력연합’ - 에 편입하려는 86세대의 계급투쟁으로 인해 매개, 굴절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86세대는 자신들의 계급투쟁과 사회변혁을 너무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편화하고 민중을 대리한다는 명분 속에서 자기기만의 심연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중민은 애초 범주와 다르게 끊임없이 기층민중을 탈각시키면서 신중간계급과 일치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86세대의 민주화운동과 정치적 주장들은 민중을 위한 계급정치라기보다는 86세대 자신들을 위한 계급정치이며, 특히 86세대 정치인과 지식인 엘리트들은 이 계급정치의 충실한 수행자였는지 모른다.128 따라서 이제 민주화 세대의 노스텔지어는 버려야할 때다. 

     

     조국 국면에서 재활성화된 ‘민주/반민주 구도’는 ‘다중격차’ 내지 ‘복합 불평등’을 은폐했다.129 조국과 정경심 부부의 자녀 교육 문제는 단순히 민주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반민주진영의 음모 따위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체감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근원적 불평등(주요 모순?)의 실제 사례이다. 그런데 교육불평등에 대한 86세대 지식인들과 그 수호세력들의 외면은, 그들의 변혁이론 또는 계급적 주장들이 더 이상 계급불평등을 설명하지 못하며, 이 모순의 복잡성을 고려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는 이 사건이 보여준 것은 교육불평등,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문화자본, 학력자본, 사회자본(네트워크)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다. 왜냐하면 실천적으로 그들은 이미 각종 자원(자본 유형)들을 동원하여 자녀들의 계층 상속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계급재생산에 대한 그들의 현재적, 실천적 관심이 변혁과 계급(재생산)에 대한 이론적 사유를 압도하면서 진영론적 정치적 입장(반 반민주)이 관철되었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86세대의 정치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여전히 옳다. 동시에 신분적 의식과 지위가 계급의 재생산 능력을 규정한다는 베버나 부르디외의 생각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계급재생산과 지배질서의 관철은 경제자본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학력자본, 사회자본 등이 결합된 ‘자본의 총량’(과 자본구성비)과 그것의 활용능력(하비투스)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조국을 수호하는 86세대 지식인들은 재생산(세습)되는 계급이 다양한 자본 형태들의 결합효과라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86세대는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공통의 경험을 시대의 ‘모순’과 민중에 대한 ‘부채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순에 가득찬 현실’을 경험했던 대학생 시절을 방황과 질풍노도, 고뇌와 고통, 열정과 헌신, 용기의 시절로 기억한다. 오늘날 조국에게 분노하는 청년・연구자들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지금도 ‘조국 수호’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부조리와 모순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항의에는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민주화가 오로지 86세대만의 정치프로젝트가 아니라면 민주/반민주 구조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시대의 모순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지 않는가. 

     

      조국의 ‘언행불일치’ 트윗어록이 연일 화제였다. 그토록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말과 글을 근거로 진지한 해석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 마저 든다. 지배계급이 이념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수 있는 까닭은 그들의 특권들의 토대에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실제로는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130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경제적・교육적 특권에 상처를 내지 않는 정치적 주장은 불평등을 정당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6세대뿐만 아니라, 누구도 자신의 사회적 조건을 완벽하게 설계하고 통제하며 예측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세대와 계급정치에 대한 지식정치학, 지식사회학적 분석은 계속 시도되어야 한다. 

     

      이른바 운동권 후일담 소설이라고 하는『폭설』의 소설가 김영현의 고백이야말로 87세대의 현실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신화를 잃어버린 존재는 날개를 잃어버린 닭의 족속처럼 초라할 뿐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더이상 변화시킬 세상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변해가는 우리 자신이다.”131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 86세대에 속하는 혹자는 86세대의 진정한 성취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예언한 바 있었다. 80-90년대 86세대가 꿈꿔왔던 사회변혁과 민주정치 완성의 꿈은 2020년 ‘조국’이 이루었는가. 지금이 그 미래다.  (끝) 

     

     

    110 부르디외,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역, 나남, 2014, 246. 

    111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0.

    112 구형진 외, ⎡4. 현재의 386, 미래의 386: 역사적・사회적 의미와 책임⎦, 한상진 편, 같은책, 2003, 292. 

    113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3.

    114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6.

    115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7.

    116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7.

    117 이남희, 같은책.

    118 한상진 편, 같은 책, 2003, 16.

    119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3-54.

    120 부르디외, 같은 책, 2014, 254.  

    121 그래서 부르디외는 이를 ‘동원된 계급(the mobilized class)’이라고 불렀다. Bourdieu, 같은 책, 11 참조. 

    122 김정한, ⎡민주화세대의 역사적 좌표⎦,『황해문화』, 2006, 100.

    123 한상진, ⎡세계적 변혁기의 민주주의 재조명⎦,『철학사상』1991, 94-101.

    124 이진경도 이같이 말한 바 있다. 페이스북, 2019. 9. 29, 댓글 중. 

    125 신진욱은 386세대를 빌미로 민주화, 평등, 진보의 가치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을 ‘386 담론의 일베화’로 규정하고 ‘386 말하지 않기’를 주장했다. 이러한 세대주의 담론은 우익 언론이 만든 프레임이며 실제 386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차지하는 세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와 김정훈・심나리・김항기의 <386 세대유감>도 비판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21541.html 민주정치와 사회변혁의 전망에 대한 현재 586세대의 과잉 표상을 비판하고 그들의 정치적 실천을 민주화의 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86세대를 과도한 정치적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진보적 가치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126 대표적으로 『문화/과학』은 87년 체제가 불완전한 민주주의체제였다는 전제하에 ‘민주화세력’이 주도하는 ‘새로운 체제’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  ⎡94호를 발간하며⎦를 참조하라.

    127 천정환, ⎡‘1987년형 민주주의’의 종언과 촛불항쟁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 대중민주주의의 문화정치를 중심으로⎦,『문화/과학』94호, 2018년 여름(재수록,『문화/과학 이론선집: 문화이론의 도래와 파장』, 문화과학사, 2019, 188). 

    128 ‘86세대가 진보적이라는 착시를 거둔다면, 86세대’가 계층상승을 추구하는 ‘계급’의 이름이라는 나의 주장은 조금 더 현실적인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한은 사회운동의 정치적 주체에 ‘세대’ 명칭을 붙이는 것은 다소 예외적이라면서 “운동세대 담론은 운동세력이 지배엘리트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재)생산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요컨대 사회운동이 운동권 출신 지배엘리트의 명분이 될 때 그 지배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가 ‘무슨 무슨 운동세대’”라는 것이다. 문제는 “운동세대 담론은 사회운동과 정치적 주체의 결합이 아니라 분리를 표현한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운동의 정치적 주체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운동과 멀어지고 무관해진 어떤 정치적 존재의 회고적 신화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86세대는 “노무현 정권에서 전면적으로 지배 엘리트로 변모했다.” 또한 86세대의 진보성과 이념성이 과대포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김정한, ⎡민주화세대의 역사적 좌표⎦,『황해문화』, 2006, 97-99,104. 또 고원에 따르면, “정치세대로서 386세대는 원래부터 다른 세대에 비해서도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이념적이지 않았으며, 개혁지향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현실과 타협도 잘하는 현실합리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들은 일상의 수준에서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라는 자부심을 숙연한 방법으로 잘 표출하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데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그러면서도 대의명분을 현실로부터 분리시켜 관리하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원, ⎡386세대의 정치의식 변화 연구⎦,『동향과전망』, 2005, 205-206.

    129 서영표는 86세대 교수 집단을 겨냥해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데 압장’섰으며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대변자라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86세대 지식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고 치켜세워진 경쟁과 능력에 따른 보상의 원리를 교육 체제 안으로 촘촘히 침투시킴으로써 학생들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서영표, ⎡비판정신의 실종과 민주화운동 세대의 이율배반⎦,『대학: 담론과 쟁점』(2), 2016, 17.

    130 부르디외, 『구별짓기(하)』, 최종철 역, 새물결, 2005, 781. 

    131 김영현, 『폭설』, 창작과비평사, 2002,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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