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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 계급정치사회학 재고Articles (draft version) 2022. 3. 25. 08:18
1. 들어가며
계급(class)은 분류(classification; classement)다. 전통적 관점에서 계급이란 누군가에 의해 ‘분류되어진’ 객관적 범주(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다. 하지만 객관적 계급을 말하고 규정하는 행위가 기존 계급 범주에 대한 정치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서로를 분류하는(classify) 실천적 행위의 반복(pattern)을 통해서 계급을 구성해가기 때문이다. 이 반복적 계급 실천들의 연쇄 속에 ‘정치’가 있다. 이 정치란 모든 사람들(일반인과 지식인)은 그저 분류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 스스로 분류한다는 사실, 즉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상적으로 정치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계급들의 존재는 [정치적인 동시에 이론적인-필자 주] 투쟁의 내기물(stake)”(Bourdieu 1998:11)이다. 계급의 정의는 그 자체로 사회적 갈등의 대상이며, 계급의 경계들은 사회과학자들에 의해서 확실하게 제시될 수 없는 투쟁의 대상이다(Bourdieu 1987:64-64). 왜냐하면 사회적 경계들의 제도화의 정도는 사회적 세계에 분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권력을 가진 계급들 간의 갈등의 상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Swartz 1996:148). 또한 계급이란 단순히 ‘주어진 것’(datum)이 아니라, 보통사람들과 이론가(사회학자)들의 다양한 실천적 활동 속에 기입되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급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실천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자 동시에 연구자들의 이론적 실천(집단형성의 정치사회학적 작업; 사회-상징적인 연금술)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에 대한 이론은 주로 지표로 표현되는 명목상의 계급 표상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스스로 계급 범주와 경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관한 연구자들의 이론(social praxiology)이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급론의 구성에 대해 다시 물을 수 있다. 계급을 정의하는 요소는 정말 무엇이고 또 그것을 정의하는 계급은 어떤 계급인가? 누구의 계급(론)인가? 그리고 사회적 계급을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메타-분석적, 지식사회학적인 질문이고 후자는 정치학적 질문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먼저 현대 맑스주의와 베버주의 계급론이 수렴하는 경향 속에 통합적 전망으로서 부르디외를 위치시키면서, 부르디외가 이들과 공명하는(또는 영향을 받은) 지점들을 탐구한다(2장). 방법론적으로 재구성된 계급 개념을 논하고(3장), 부르디외의 장 개념이 계급투쟁의 계급 행동을 과잉결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임을 주장한다(4장). 이후 부르디외의 문제의식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의 몇 가지 의의를 찾아볼 것이다. 이는 부르디외가 맑스(주의)에게서 배운 것일 수 있다(5장). 이러한 의의는 결론적으로 부르디외의 계급사회학이 이전 계급투쟁의 산물로서 계급 범주를 해체하는 지식사회학이며, 동시에 계급투쟁적 전망과 학문적 실천을 통해 계급 범주를 재구성하려는 계급정치학에 다름 아님을 주장하는 데에 도달할 것이다(6장).
2. 맑스주의와 베버주의의 수렴과 통합으로서의 부르디외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권력과 지배의 사회학’(Gorski 2013)이다. 부르디외의 기본적인 의도는 지배와 권력, 불평등을 설명하고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질문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세계는 지속되고 존재 안에서 계속되는가, 사회질서는, 아니 질서를 구성하는 규율 관계는 어떻게 영속되는가, 달리 말해 권력의 상이한 형식들은 어떻게 영속되는가”(Bourdieu 1993d:125; 이상길 2018:234에서 재인용). 이런 점에서 부르디외가 고전사회학자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의 이론을 종합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은 분명하다(Brubaker 1985: Swartz 1997; Wacquant 2013:41 참조).2 특히 부르디외는 ‘상징적 지배’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맑스, 베버, 뒤르켐의 접합점을 발견했다(이상길 2018:238). 이상길(2018:232)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사회의 계급 분화와 계급 지배’라는 마르크스의 명제와 ‘정신구조의 사회적 발생’이라는 뒤르켐의 명제를 결합한 후, 이 “마르크스화된 뒤르켐적 아이디어”를 다시 베버의 종교 분석에 통합시킨다(Bourdieu 1975:21; 또한 Durkheim & Mauss 1968 참조).
지배와 계급이라는 문제의식에 기반한 이론의 통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의 핵심을 드러낸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계급사회의 지배는 그 현실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상징체계와 함께 갈 때 효율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계급 지배는 의도적이고 강제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식이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효과”라는 것이다(이상길 2018:233). 즉 지배는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당연하고도 불변적인 상태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계급구조와 인지구조의 조응”으로 관철된다(이상길 2018:232).3
그렇다면 지배나 모순의 문제에서 계급은 어떤 설명적 지위를 갖고 있는가? 이른바 맑스주의의 ‘계급우선 명제(class primary thesis)’는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데에 유익한 준거점이 된다. 지배 문제에서 생산관계 중심의 경제적 계급의 문제가 핵심적인가? 즉 한 사회의 ‘주요 모순’ - 그것이 있다면 -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얼마나 ‘계급적’ 성격을 갖는지, ‘계급’으로 정의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를 답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일반적으로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통한 착취나 경제적 계급관계가 우선적으로 또는 궁극적인 설명변수(최종심급)라고 주장할 것이고, 반면에 베버주의자들은 이견을 가질 것이다.
여기에서 계급 개념의 정의가 문제가 된다. 계급을 구성하는, 또는 계급의 경계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부르디외는 어떻게 답할까? 현대 맑스주의는 비계급형태의 억압을 고려하는 다차원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맑스주의자들이 착취에 기반한 기존 계급 정의에 지배관계나 권위(또는 자원에 대한 집단의 통제와 배제)를 포함시키게 되면 지배에 있어서 계급형태가 비계급형태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Burris 1991 참조). 설령 착취에 기반한 계급론을 일정부분 포기하고 비계급 형태의 지배를 포함하게 되더라도 계급과 지배의 문제의식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부르디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까?
계급론에서 계급 범주를 분류하는 기준은 그 강조점을 생산이냐 소비냐, 착취냐 지배(통제)냐, 물질적 소유냐 상징적 정당성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계급을 착취의 관점에서 정의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의 관점에서 정의할 것인가? 계급 범주에 대한 분류와 정의는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 즉 지배권력은 생산관계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시장에서 나오는가, 경제적 소유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상징적 인정에서 나오는가? 일반적으로 계급을 정의하는 요소에 대해 맑스주의자라면 궁극적으로 물질적인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라고 답할 것이고, 베버주의자라면 소비시장에서 인정된 생활양식이라고 답할 것이다. 즉 맑스주의와 베버주의에서 지배권력은 각각 물질생산(관계의 객관적 위치)과 문화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물론 맑스와 베버는 공히 물질적 자산의 소유를 계급 구성의 주요 요소로 간주했다. 부르디외는 이 양자택일적 요소를 장 이론과 ‘상징적 재화의 경제’ 개념을 통해 엮음으로써 통속적으로 이해된 두 계급론을 통합하고 지배권력을 설명한다.4 이하에서는 네오맑스주의와 네오베버주의를 설명하면서 이 양자가 수렴하는 문제의식이 부르디외의 이론과 공명함을 대표적인 두 계급사회학자인 에릭 올린 라이트와 구해근을 통해 약술하겠다.
계급론 통합의 선결조건은 방법론적인 배치 또는 재구성에 있다. “사회계급에 관한 이론은 객관주의적 이론과 주관주의적 이론(혹은 한계주의적 이론) 사이의 대립을 지양해야만 한다”(Bourdieu 2013:15). 부르디외는 보통 맑스주의가 취하는 객관주의적 계급론과 베버주의의 주관주의적 계급론의 대립을 허구적인 대립으로 보고 이를 재고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베버주의 이론 사이의 대립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의 양자택일 만큼이나 허구적인 또 다른 양자택일을 구축”한다는 것이다(Bourdieu 2013:14).
부르디외에 따르면 맑스의 계급과 베버의 신분집단(status group)은 (미국의 베버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Bourdieu 2013:15). “베버의 신분집단은, 마르크스의 계급과 대립한다고 여겨졌지만, 사회공간의 구조에서 파생된 범주들에 따라 인식될 때, 이 공간의 적당한 분할을 통해 구성된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Bourdieu 2014:298). 이렇게『구별짓기』는 이 대립을 재사유해보려는 노력이다. 『구별짓기』는 맑스와 베버의 관점을 존재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공유된 성향과 ‘객관적으로 조화된’ 실천들에 초점을 맞추어 신분집단의 형식 안에서 통합시킨다(Brubaker 1985:763). 부르디외는 사회계급과 신분집단 개념을 “물질적 차이들의 객관성과 표상들의 주관성”이라는 “사회적 분리의 이중적 근원”이라는 문제틀 속에서 합쳤던 베버를 따르면서도 종국에 이 두 개념을 배타적인 존재 유형으로 구별하는 “안이한 실재론적 해결책”으로 퇴보하고 말았던 베버의 한계를 지적한다(Bourdieu 2013:15). 계급과 지위는 항상 경제적 측면 혹은 상징적 측면을 강조하는 선택의 결과로서 경제적 측면과 상징적 측면은 동일한 실재에 항상 함께 존재한다. 베버는 ‘실제 통일체(real unities)’의 두 유형으로서 계급과 지위집단을 대조시켰지만, 명목상으로만 통일체로 취급했다. 경제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통합은 결과적으로 불평등한 계급관계가 정당화되는 지배양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베버적이라고 할 수 있다(Weininger 2005:120).5 즉 계급 구조를 권력과 특권의 구조로 본다는 점에서 부르디외는 분명 베버적이다(Brubaker 1985:761). 그럼에도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사회계급과 신분집단은 두 개의 구별되는 집단 유형이 아니라, 실제 통일체인 사회적 행위자와 계급의 두 가지 속성이자 “사회적 분리의 이중적 근원”을 구성하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계급은 경제적 소유(재산)에 따라, 신분집단은 생활양식의 차별화에 따라 정의된다. 따라서 어떤 행위자가 사회적으로 갖게 되는 위치(계급)는 경제적 소유와 생활양식의 차이의 교차점에서 정해진다. 하지만 생활양식에 의해 차별화되는 지위는 계층적 위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베버주의자들은 지위집단 개념을 통해서 기존의 계급을 보다 복잡한 변수들을 통해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계급은 시장(계급상황)에서 재산이나 상품, 노동력의 소비와 처분, 그에 따른 생활경험에 따라 (맑스보다 다양하게) 분류된다. 자산(재산)은 계급상황의 기본적 범주이지만 시장상황과 위치에 따라 상이한 (사회)계급으로 묶일 수 있다. 즉 계급은 단지 자산(은 기본이지만)이나 생산수단의 소유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기회구조에 따라 이합집산될 수 있는 집단이다. 다시 말해 경쟁적 시장에서 자산의 소유 여부가 계급 분화와 정의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긴 하지만, 사실상 시장에서 거래되고 경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집단(계급)을 묶거나 해체시키는 요인들이 된다. 베버를 따른다면 이 ‘모든 것’에 지식, 기술, 문화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미세한 차이들에 따라 그만큼 많은 계급 구분이 가능해진다.
베버는 계급 정의에는 자산(재산)이, 계급행동의 원천에는 경제적 이익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급이익의 ‘표현’에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베버에 따르면 계급이익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정한 계급이익인지는 자산 소유여부나 경제적 이익만으로는 정의되기 어렵다. 그것이 특정한 집단의 이익으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집단들과의 표현적 관계 속에서 - 시장 상황의 기회구조 속에서 - 가치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경제적 계급 개념이 결정론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이유는 계급과 지위 사이 관계가 자의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베버의 계급론은 계급이익을 계급의식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이익이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계급의식을 불러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다차원적 요인을 고려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특히 계급의식은 계급갈등을 인식함으로써 계급이익과 연결된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계급을 경제적 구성물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구성물로서”(장미혜 2002:122-123) 보는 부르디외의 입장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6
베버는 ⎡계급, 지위집단, 정당⎦을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 되는 같은 범주에 놓고 논의함으로써 지배와 권력의 다차원적 관점을 설명했다. 즉 어떤 행위자(집단)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은 계급이라는 (전통적) 단일한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지위집단-정당의 교차를 모두 고려함으로써 다차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집단형식들은 각각 서로를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 가령 정당은 정치적 가치(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자발적 결사체로서 계급이나 지위(생활양식의 차이)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구성원)의 권력이나 성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지위집단(차이)을 규정하는 생활양식(차이) - 문화적 지배 - 은 계급관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이러한 다차원적 관점은 계급과 다른 형태의 비계급적 지배 또는 억압들(가령 인종, 젠더, 종교)과의 교차를 사유하는데까지 응용함으로써 지배의 복합성을 분석할 수 있다. 예컨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다시피, 성적 억압이나 젠더불평등도 계급관계의 반영이 아니라, “계급을 규정하는 생산관계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이데올로기적 과정”(Burris 1991:141)으로서 계급구조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다차원적 문제의식은 라이트 같은 네오맑스주의 계급론자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종과 계급 간의 관계를 논의한 라이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분석의 기본 전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사회적 불평등의 여러 차원이 계급불평등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관계가 그 밖의 형태의 불평등을 구체화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경험적이며 이론적인 문제는 인종차별과 계급관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가려내는 것이지, 전자를 후자 속에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Burris 1991:142에서 재인용).
네오맑스주의 계급론은 베버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Burris 1991 참조). 계급의 역사적 변형에 대한 설명에서 행위 이론을 도입하고 비계급관계(인종 및 성 등)와 비경제적 실천(이데올로기)의 자율성과 영향력을 부여한다. 특히 계급의 형성이나 분열에 대한 설명에서 시장 관계를 고려한다(Burris 1991 참조). 현대 맑스주의 계급론은 노동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 ‘노동시장 분할(laber market segmentation)’을 설명하기 위해, 보통 문화적 차이나 허위의식을 제시했지만 이러한 문화적 요인들은 노동을 파는 객관적인 조건의 차이와 직업 성질에서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부르디외가 했듯이 시장 내의 사회적 관계 자체에 대한 분석이 중요해졌다.
네오맑스주의 계급론자들 중에서 에릭 올린 라이트는 맑스와 베버 계급론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에서 더 미세한 차이와 공통점을 보는 데로 나아갔다.
베버는 시장 또는 교환 관계에 기반한 계급 정의를 채택하는 데 반해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에 기반한 정의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실제 차이는 보다 더 미묘하다. 마르크스와 베버 모두 생산 자산에 대한 유효한 소유에 기반하여 계급을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생산에 기반한 정의를 채택한다. 베버에게 이 자산들은 자본, 노동력, 기술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자본주의 분석에서) 자본과 노동력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베버는 시장 교환의 관점에서 생산을 바라보는 데 반해 마르크스는 생산이 발생시키는 착취의 관점에서 생산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는 (…) 사회에 대한 문화주의 이론과 유물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반영한다(Wright 2005:148-49).
현대계급론은 중간계급 문제에서 문화자본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 개념이 시사하는 자원의 독점과 배제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맑스주의와 (신)베버주의를 연결했다. 물론 여기에서 라이트나 (라이트가 설명하는) 굴드너의 문화자본 개념이 부르디외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이 개념의 핵심적 문제의식이 생산과(또는) 소비에서 자원의 독점과 배제(통제)의 논리에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라이트는 맑스주의 경제학자 로머(John Roemer)의 이론을 발전시켜 계급을 지배가 아니라 착취 중심적 개념으로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맑스주의와 베버주의(파킨)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유사점이란 계급관계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자원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라이트와 로머에게 계급구조를 정의하는 착취는 “핵심적 자산 생산의 독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편 신베버주의자 파킨(Frank Parkin 1979)은 베버가 말한 ‘사회적 폐쇄’를 계급구조의 구성적 원리로 주장했다. ‘사회적 폐쇄’란 “사회의 각 집단들이 제한된 자격자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원이나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보상의 극대화를 구추하는 과정”이다.
라이트는 굴드너의 문화자본을 통해 베버의 ‘사회적 폐쇄’를 설명했다. 굴드너는 ‘신계급’을 문화적 부르주아로 정의했는데, 문화적 부르주아란 ‘문화자본’을 통제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자본’이란 ‘팔 수 있는 유용물은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유자에게 ‘소득’을 제공하거나 그 소득을 경제적 생산성에 대한 기여도에 의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발생시키는 모든 생산물이다. 굴드너는 소득에 대한 이러한 권리 주장이 ‘다른 사람들이’ 자본재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제한할 것이라고 위협함으로써 강제적으로 인정된다고 논한다”(Gouldner 1979:21; Wright 2005:147-48에서 재인용).
또한 라이트(Wright 2005:148)는 기든스를 통해 계급을 시장 능력과 자원의 소유로 정의했다. “통상적으로 [계급구조화에서] 중요성을 띤다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시장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생산수단에서 재산권의 소유, 교육-기술자격의 소유, 육체노동력의 소유”이다. 이 각각의 능력들과 자원의 소유는 각각 “자본주의 사회의 3계급(상층, 중간, 하층 또는 노동계급)”에 대응한다. 계급관계의 물질적 기초는 생산 자원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이고 서로 다른 계급들은 서로 다른 자원의 보유자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으로 보면 계급을 규정하는 맑스주의와 베버주의의 공통적 원리가 독점과 배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계급은 자원의 독점과 배제의 관계로 규정된다.
라이트는 오늘날 자본가가 기업과 같은 어떤 ‘조직 자산’을 ‘소유’한다는 의미는 소유권이나 재산권이라기보다는 노동에 대한 ‘집합적 통제권’이라고 말한다(Wright 2005:122). 즉 자산의 소유는 자산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자산에 대한 ‘통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원에 대한 타자의 접근을 배제 - 베버식으로 ‘사회적 폐쇄’ - 함으로써 불평등한 자원 배분 구조를 유지시키는 제도적 자격과 권력이다. 그러므로 ‘조직 자산’의 ‘소유’는 위계적인 권위의 행사와 구별되기가 꽤 어렵다(Wright 2005:153). 따라서 라이트는 지배 개념을 없애고 유물론적 착취에 입각해 맑스주의적 계급 정의를 구축하려는 의도였음에도,
계급의 정의 속에 ‘기술’ 및 ‘자격’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는 바로 그것이 문화주의적 형태의 분석으로 불가피하게 미끌어지게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베버주의자들 모두가 주장한 바와 같이, 어느 주어진 사회에서 ‘기술’로 간주되는 것이나 또는 자격에 의해 증명된 것은 매우 상당히 사회적 구성물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자들의 주관적인 상태에 달려있다(Burris 2005:153).
이러한 기술자원과 자격,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주관적 차원은 문화자본 독점을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공명한다.
또 구해근(2007)에 따르면, 부르디외의 계급론은 네오맑스주의와 네오베버주의가 수렴하는 현대계급론의 대표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베버적으로 해석된 부르디외의 계급론과 맑스주의 계급론을 결합시킨 모델을 제안했다.7 그에 따르면, 계급론의 최근 동향은 생산관계 중심의 계급 개념을 지양하고, 계급 분화의 핵심적 메커니즘을 소비 영역에서 찾는데 있으며, 계급 형성에 있어서 과정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는 담론, 언어, 전통적 문화 가치, 정당의 역할 등이 중시되고, 집단 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계급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된다.
여러 가지 재화는 그것들이 관계적으로 지각되자마자 변별적 기호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것은 탁월성의 기호일 수도 있고, 또한 통속성의 기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 계급은 존재상태에 의해서 정의되는 동시에 그것의 지각상태에 의해 정의되고, 또는 생산관계의 그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동시에 그 소비행동(이것은 과시적이 아니면서도 상징적일 수 있다)에 의해서도 정의된다(비록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Bourdieu 2005:867).
또한 부르디외 계급론의 중요한 특징은 불평등의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구해근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경제적인 착취와 소외 못지않게 상징적인 억압과 폭력을 중요시하고, 이 두 차원의 불평등 관계를 계급 개념에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부르디외의 계급 개념은 베버의 경제적 계급(class)과 신분집단(status)을 통합한 개념이고, 계급은 생활기회(life chance)뿐 아니라 생활양식(life style)을 공유한 집단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생활조건(condition of life)은 세 가지 종류의 자본을 얼마만큼 그리고 어느 형태로 소유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았다(구해근 2007:266).
이처럼 맑스주의와 베버주의의 수렴 속에서 부르디외의 계급론을 독해할 수 있다. 오늘날 계급연구는 생산과 착취문제 중심적인 네오맑스주의와 시장과 소비, 통제문제 중심적인 네오베버주의가 수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Edgell 2011; 구해근 2007; 장미혜 2002 참조). 그리고 이에 따라 ‘확장된 계급’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다.
3. 방법론적 관계주의로 재구성된 계급 개념
맑스주의와 구별되는 부르디외 계급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지배의 효과가 상징적이며, 지배권력의 (재)생산이 자본에 대한 상호 상징적 인정(오인)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이 인정은 또한 상징적으로 재편된 사회적 공간에 근거한다(김현준, 김동일 2011 참조).8
부르디외 계급사회학의 핵심에는 ‘방법론적 관계주의’가 있다. 물론 맑스나 뒤르켐 역시 사회적 실재가 관계로 구성되었음을 인식했다(Wacquant 2013:36 참조). 이른바 ‘관계적(relational)’ 사유는 맑스와 뒤르켐에게서도 공히 강조되는 방법론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이 관계론을 통해서 맑스주의와 구별되는 계급론적 전제를 구축한다.
주지하다시피, 부르디외는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구조주의 대 실존주의, 기계론 대 목적론, 구조적 필연성 대 개인적 행위자성, 실체론 대 사회물리학 대 사회현상학(또는 기호학), 실증주의 대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했다.9 바캉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구조와 행위의 이분법, 미시와 거시 분석의 이분법을 버렸다(Wacquant 2015:41). “부르디외는 객체와 주체, 의도와 원인, 물질성과 상징적 재현 간의 분리를 거부하는 비-데카르트적인 사회존재론에 바탕을 둔다”(Wacquant 2015:44). 그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이러한 대립쌍을 “적대적인 패러다임들의 ‘세계 가설’(Pepper 1942)”이 아니라, “내생적으로 이중적인 사회 세계의 실재를 다시 포착하기 위한 분석 형식의 계기들로 변환”시켰다(Wacquant 2015:52). 즉 단지 대립쌍에 대한 양비론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접근과 ‘구성주의적’ 접근을 함께 엮는” 것이다(Wacquant 2015:52). 그는 “서로 적대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론적 전통들을 하나로 엮”었다. 예컨대 “계급을 물질적 세력관계 속에 근거 짓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보존하면서도 이를 집합표상에 대한 뒤르켐의 가르침과 결합시키며, 지각된 사회적 차별성으로서의 지위의 잠재력과 문화 형식의 자율성에 대한 베버의 관심을 다시 융합”했다(Wacquant 2013:41). 그래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 ‘꼬리표’가 붙을 우려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관한 일반과학(general science of practices)’이라고 부르며 ‘구성주의적 구조주의’(constructivist structualism) 또는 ‘발생 구조주의’라고 명명했다.
구성주의가 “세상이 만들어낸 행위자들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핀토는 이를 “이중적 현실주의(double realisme)”라고 표현했다(2003:159). 이러한 부르디외의 구성주의는 행위자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자가 세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현실을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이러한 두 번째 현실은 특권적인 객관주의적 시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들을 인식하려는 여러 (학자들의) 입장들 간의 차이에 의해 유의미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찰적 사회학이다. 핀토는 이를 “성찰적 현실주의”라고 설명했다(2003:160). 따라서 부르디외의 구성주의적 방법론에서는 “관점들의 체계를 구축”(핀토 2003:159)하는 일, 즉 입장들의 공간인 장을 구성하는 작업이 중요하게 된다. 부르디외는 사회과학의 주요 목표가 계급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이 경계지어질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05:56-57; 1998:32).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렇게 구성된 사회적 공간이란 이론상으로만(on paper)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매 경우마다, 경험적으로 관찰된 사회적 공간을 이론적으로 재생성시키도록 허용하는 분화(differentiation)의 원리를 (구성주의와 실재론 간의 대립을 넘어서) 구성하고 발견해야 한다”(1998:32).
앞서 언급했다시피,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적 사회관과 단절하고 맑스주의 계급론을 “해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사회공간이라는 다차원의 위치공간을 내세웠다(이상길 2018:195).
사회공간 이론의 축조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일련의 단절을 전제한다. 관계 대신에 본질 - 여기서는 실제의 집단들이 되겠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이 집단들의 숫자, 경계,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정의한다고 자처한다 - 을 특권화하는 경향과의 단절, 그리고 학자들이 구성한 이론적 계급을 현실적 계급, 즉 실제로 동원되는 집단으로 착각하는 지성주의적 환상과의 단절, 다차원적 공간인 사회적 장을 경제적 장으로, 사회적 위치들과 조응하도록 구성된 경제적 생산관계로 환원하는 경제주의와의 단절. 객관주의는 사회세계에 대한 표상 자체를 둘러싸고 다양한 장에서 벌어지는 상징적 투쟁, 특히 상이한 장들 간의 위계 및 이 장들 각각의 내부적 위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Bourdieu 2014[2001, 1984]:285).
부르디외는 계급과 같은 사회적 실재에 대한 명목론과 실재론 모두를 반대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로 “관계들의 객관적 공간”의 존재와 “근본적인 차이들”을 제시한다. “하나의 사회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들, 특히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들을 무시한 채 사람들을 되는대로 한데 모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Bourdieu 2014:290-291). 사회공간의 근본적인 구성원리인 이 (경제적, 문화적) ‘차이들’, ‘위계들’은 부르디외에게 있어 기각될 수 없는 인식론적 전제이다. 이것이 맑스주의의 계급 개념을 해체하는 원리다.
부르디외는 계급이라는 용어는 사용하면서도 계급 정치는 삭제하는 기존의 계급연구들을 비판하고자, 그들의 계급 개념을 해체하고 방법론적 관계론을 통해 계급 개념을 복권하고자 했다.
오늘날 많은 계급론에서 거대한 중산층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부르디외가 보기에는 “사회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사회적 계급들의 문제 해결을 가로막은 주요 장애물”이며, 사실상 “계급”이라는 단어만 썼을 뿐, “차이들과 분화 원리들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차이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정의인 생산의 사회적 관계 내에서의 위치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는 권력의 다양한 원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Bourdieu 1985:723). 맑스주의에서 계급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 내의 위치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결정되지만, 부르디외에게서 계급은 자본 보유규모의 총량과 세 가지 자본의 구성비(구조), 그리고 사회적 궤적에 따라 계급 하비투스에 의해 매개되어 결정된다. 부르베커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계급을 생산관계의 문제로 정의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로 정의했다. 계급 분할은 생산수단과의 상이한 관계의 차이에서 규정되지 않고, 존재 조건의 차이, 차별적 조건에 의해 생산된 성향체계의 차이, 권력이나 자본의 축적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Brubaker 2004:46). 예컨대 자본의 총량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계급으로 치부될 수 있는 쁘티부르주아지의 경우,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비율(구조)에 따라, 상대적으로 문화자본이 많고 경제자본이 적은 교수 집단과 문화자본이 적고 경제자본은 많은 기업인 집단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 양 집단은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계급으로서 동일한 정치행위와 정치의식을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상이한 이해관계와 행위전략을 갖고 대립할 수도 있다. 게다가 궤적이라는 시간적 변수는 상이한 계급 하비투스를 구성함으로써 계급 내 차이(분파)를 만들어낸다.
사회계급은 단 하나의 특성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으며(가령 그것이 자본의 양이나 구조처럼 가장 결정적인 특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러 특성들(성별, 나이, 출신계급이나 출신 종족 - 백인의 자식과 흑인의 자식, 토착민의 자식이나 이민[자]의 자식 등 - 수입, 교육수준 등)의 총합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으며, 인과관계 즉 조건지우고 조건지어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기본 속성(생산관계 상의 위치)을 중심으로 짜여진 일련의 속성들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관여적 속성들간의 관계구조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구조가 각각의 속성과 각 속성이 실천에 행사하는 효과들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 이처럼 물질적 생활조건과 각 조건이 부과하는 조건화의 기본적 결정요인들을 중심으로 가능한 최대로 동질적인 계급을 구성한다는 것은 결국 이 계급들을 구성할 때나 각 속성과 실천의 분포의 계급별 변이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의식적으로 이차적인 특성들의 관계망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Bourdieu 2005:205-206).
사회계급은 사회가 관계적 속성들에 마치 독립적인 속성인 것처럼 부여하는 고유한 가치의 승인 또는 정당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계급이나 계급 분파는 직업이나 소득, 교육수준과 같은 지표를 통해 인지될 수 있는 생산관계상의 위치 뿐만 아니라, 성비나 지리적 공간(…)의 배분에 의해서도, 그리고 일군의 보조적 특성들” 또는 “이차적 특성들”에 의해서도 정의된다(Bourdieu 2005:198).
따라서 계급 현상의 본질은 물적 조건의 즉각적 반영이 아니라, 자본의 양과 구조에 의해 위치와 가치가 부여된 성향에서 발생하는 실천이다. 가령 사회계급에 따라 성별분업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계급이 성별보다 궁극적 변수나 근원적 모순이라서가 아니라, 계급이 성향에 위치와 가치를 부여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Bourdieu 2005:208).
경제적 계급의 인지 또는 상징적 논리는 『구별짓기』에 대한 오해를 교정함으로써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흔히 『구별짓기』는 한글 번역판의 부제처럼 “문화의 취향의 사회학”으로 이해된다. 문화자본을 활용한 영미권의 많은 연구들도 이러한 경향을 띠었다(Flemmen 2013 참조). 마찬가지로 단순한 ‘문화취향에 대한 계급결정론’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화(상징적인 것)와 계급(경제적인 것)을 교차시키는 부르디외 계급사회학의 섬세한 차원을 생략한다. 부르디외가 애초에 문화자본을 도입한 의도는 동일한 경제자본의 소유집단인 지배 계급 내의 분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장미혜 2002:91 참조). 하지만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이 단순히 상호 보완적이라거나 아니면 배타적이라고 하는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Frows 2000:52 참조). 왜냐하면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경제적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적 자본이나 상징적 자본이 동시에 작동해야만”(홍성민 2002:33)하기 때문이다.
『구별짓기』는 계급분석을 문화분석으로 확장한 것이지만(홍성민 2002 참조), 문화가 계급의 단순한 반영이며 문화자본이 경제자본의 문화취향적 외피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취향의 차이는 단순히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라는 기존의 계급 관계의 차이를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장미혜 2002:90). 즉 차별적인 취향이나 문화 자본은 계급 범주들 간의 경계나 편차를 단순히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차이로 인식하는 어떤 상징적 표상들은 다른 상징적 표상들과 관계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맺음으로써 계급을 형성하고 계급에 대한 사회적 의미값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객관적 차이는 표상 또는 상징 속에서, 그것에 의해서 차별화의 이윤을 생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몸짓, 언어, 옷, 가구, 자동차 등등 모든 사회적 대상/사물은 상응하는 속성들의 표상 체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관련되어 있다. 즉 피부가 하얀지, 검은지,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 옷이 어떤 브랜드의 것인지 등등의 속성은 객관적이며 물질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상징적인 차원의 이윤을 생산하는 원천이 된다”(이상길 2015:488). 문화적 소비라는 계급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계급은 이미 상징적 관계의 표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적 상징들의 (경제적으로 부정된) 차이의 감각(하비투스)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날 유의미한 경제(적 자본의 축적)는 가능하지 않다.10
4. 다차원적인(과잉결정되는) 계급투쟁 공간으로서의 장
부르디외는 사회세계를 다차원적인 공간으로 전제하고, 경제적인 것을 다차원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파악한다. 즉 전체 사회적 공간을 경제적 장으로 환원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비단 고전적 맑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반대하는 데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투쟁의 정치가 경제적인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차원적인, 즉 사회적 영역들의 복잡한 관계들을 통해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발생구조주의에 입각하면, 계급들은 “계급 기반의 지각/평가/행동의 도식을 펼쳐내는 정도에 따라” 존재한다(Wacquant 2013:42). 방법론적 관계론에 의해 연속적인 차이들의 관계로 재구성된 사회적 공간은 다시금 자본의 불균등한 배분구조에 따른 갈등과 투쟁의 관계 구조로 개편된다. 다시 말해 관계론은 자본배분구조에 의해 “총체적 계급 관계의 장”(이상길 2018:206)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장을 계급투쟁의 공간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의 ‘기구(apparatus)’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장 속에서 행위자들과 제도들은 차별적 힘을 갖고 있으며, 장의 유희가 내기물로 건 특수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서 유희 공간의 구성적 규칙에 따라 투쟁한다. 장의 지배자들은 장을 그들에게 유리하게끔 기능하게 만들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장의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고려해야 한다.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의 저항과 반응을 완전히 무화시킬 수 있을 때, 즉 하위의 성직자들이나 정치 투사들, 민중 계급들이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지배를 받아들일 때, 모든 운동이 위에서 아래로 진행될 때, 지배 효과가 장의 변증법과 장의 투쟁 둘 다를 불가능하게 만들 때, 장의 하나의 기구가 된다.
장과 기구의 차이는 혁명 속에서 잘 파악된다. 사람들은 사회 질서를 급진적으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기구’를 점령하고 거대한 기계의 프로그램을 바꾸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정치적 의지는 극단적으로 복합적인 우주, 사회적 장들의 논리를 고려해야 한다. 그 우주 속에서 정치적 의지를 반전되고 역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Bourdieu 2004[1978]:150).
장은 “저항과 반격이 존재하는” 투쟁의 공간이다(이상길 2018:217). 하지만 이 장의 역사와 행위자의 하비투스가 완전히 일치해서 피지배자들이 지배를 받아들일 때, 즉 투쟁과 저항이 종료되거나 완전히 사라지면,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국가 장치(기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동연(2010:39)에 따르면, 장 이론은 “실천적 시민사회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이 갖는 한계점들을” “보완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ISA도 “계급투쟁의 목표이자 현장”이며 피착취계급의 저항전략을 발견하려는 취지를 갖는다. 따라서 “계급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장의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계급투쟁, 궁극적으로 지배를 장을 통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을 단지 국가 기구를 점령하는 것만으로 완성된다고 보지 않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 그러나 상동적인 장들의 논리를 통해 다양한 정치적 의지들의 번역이나 왜곡을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세계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의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의 구조적 효과에 의해 굴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와 계급투쟁(상징적 분류투쟁)의 다차원성은 메타-장인 권력 장 및 장들 간의 “상동성은 사회적 공간에 배치된 한 계급 집단이 또 다른 사회적 집단과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각각의 사회적 장을 지배하는 특수한 이해 관계가 절묘하게 맞물려 서로 다른 사회 계급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해 준다 … 사회적 공간의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계급의 차별적 속성은 다른 사회적 공간의 계급적 속성에 영향을 주거나 받기도 하는 것이다”(홍성민 2002:34). 다시 말해 장 이론은 장들 간의 ‘구조적 상동성(structural homology)’11을 통해 계급 형성과 계급 행동의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을 설명한다.
5.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맑스 계급론의 의의
맑스의 계급론은 당대의 당연시된 계급범주를 문제삼았다. 계급이라는 단어는 본래 귀속지위의 세습과 재산에 따른 집합체의 정태적 범주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계급의 근대적 정의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사회 변동을 설명하는 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Edgell 2001:21). 즉 오늘날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착된 계급 개념은 새로운 근대적 계급의 탄생을 설명하려는 이론적 노력의 산물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에 탄생한 이 새로운 계급이란 귀속지위가 아니라, 성취지위, 즉 능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부르주아지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출생신분이나 단지 재산여부가 아니라 돈을 버는 ‘능력’에 의해 정당화된 계급이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 계급의 능력은 또다른 설명이 불필요한 인격체의 속성으로 자연화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의미에서 진정한 계급의 탄생이다.
그러나 맑스는 부르주아지의 능력을 구성하는 조건들이 무엇이었는지 묻고 해체를 시도했다. 도대체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설명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맑스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생산관계 내에서의 위치,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착취(능력)가 부르주아 계급 정의의 핵심임을 밝혀낸다. 부르주아지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이를 통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로부터) 착취를 잘 할 수 있는 (관계적 위치로 말미암는) 능력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이익(임금)을 최소화하고 잉여가치를 최대화하는 능력인 것이다. 즉 부르주아지의 내적 속성으로 간주되었던 ‘능력’의 원천적 조건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생산관계 내에서의 ‘착취’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맑스의 계급론이 자연적인 것(=설명불필요한 것)을 해체하고 그것의 구성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맑스의 계급론이 ‘도그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당연시된 계급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취지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계급 본질주의와 실체론을 피하려는 부르디외의 계급사회학의 취지와 공명한다.
맑스의 계급론이 지배-피지배 관계성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부르디외 역시 이 기본적인 적대구도나 갈등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변화를 포착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맑스에게 충실하다.12 지배의 문제 또는 계급관계에서 맑스가 기여한 중요한 지점 중에 하나는 지배와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를 (전근대의 봉건적 관계와 다르게) 새롭게 보았다는 점에 있다. 지배-피지배 관계는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양자의 관계는 보편적인 ‘적대’로 추상화될 수 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가 “모든 봉건적, 종교적, 목가적 관계를 종식”시키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관계”를 “남겨놓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 대신에 부르주아지는 이 관계를 “적나라한 자기 이익, 냉담한 ‘현금지불’”, “착취로 대체”했다고 말했다(Edgell 2001:23에서 재인용).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과거보다 더욱 수단적이며 비인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Edgell 2001:23). 따라서 맑스의 계급양극화나 계급적대는 교조적인 명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준에서 탐구될 수 있다. 그리고 지배-피지배의 구체적 관계나 그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갈등과 계급투쟁은 그 변화를 통해서 지속될 것이다.
부르디외의 계급론은 지배/피지배 관계성의 변화나 계급분파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계급양극화가 역사적으로 (상이한 외형을 띤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재출현한다는 맑스주의적 발상을 수용할 수 있다. 맑스는 계급양극화와 계급분화를 구조적 환경(가령 정치적 갈등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계급을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이고 갈등적인 용어로 개념화했으면서도 다양한 계급분파들을 인식했다. 그리고 중간계급의 존재와 팽창경향을 인정하기도 했다(오늘날 계급과 이데올로기를 사유하는데 있어서 중간계급은 더욱 중요하고 문제적인 집단이다).
이것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부르디외는 계급(분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베버는 일차적으로 계급을 점진적(gradational) 차이들로 구성된 ‘연속체(continuum)’(Swartz 1997), 즉 자산과 생활기회의 차이로 줄세울 수 있는 계층들로 파악했다. 마찬가지로 부르디외는 방법론적 관계론을 사용해서 사회적 세계를 상이한 위치들과 자본들의 차이 공간으로 재편했다. 부르디외는 예컨대 (중간)계급들의 단일한 이미지에 대해 반대하며 관여적 속성들의 차이로 계급(분파)들을 구별했다. 하지만 계급을 연속체로 파악하는 것이 통계에 의존해 계급 구분에만 몰두하는 학자들처럼 계급갈등이나 적대를 무화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파레토는 이러한 문제를 잘 지적한 바 있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파레토는 “그 누구도 부자와 빈민, 토지 혹은 부동산 자본가와 노동자를 절대적으로 분리하는 선을 그을 수는 없다. [한데] 몇몇 저자들은 이 사실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을 논할 수도 없고, 부르주아와 노동자들 대립시킬 수도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Bourdieu 2013:17).
베버의 ‘사회계급’ 개념은 ‘연속체’론의 한계를 넘어, ‘불연속성’과 계급갈등을 전체 사회세계의 상징적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바캉(Wacquant 2013:38)도 부르디외 계급론의 “갈등중심적” 성격이 베버와 가깝다고 평가했다. 계급은 시장(계급상황)에서 재산이나 상품, 노동력의 소비와 처분, 그에 따른 생활경험에 따라 (맑스보다 다양하게) 분류된다. 경쟁적 시장에서 자산의 소유 여부가 계급 분화와 정의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긴하지만, 사실상 시장에서 거래되고 경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집단(계급)을 묶거나 해체시키는 요인들이 된다. 베버(그리고 베버리안 분석맑스주의자들)를 따른다면 이 ‘모든 것’에 지식, 기술, 문화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미세한 차이들에 따라 그만큼 많은 계급 구분이 가능해진다(기든스 2010:314). 하지만 베버는 계급상황(또는 시장상황)적 요인들의 특정 조합으로 인해, 계급분파 내지 하위집단들이 흡수, 압축되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 상징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 포괄적 계급범주가 출현하며 그것이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포괄적 계급범주를 ‘사회계급(social class)’이라고 한다. 가령 판검사나 공무원이 로펌에 쉽게 취직할 수 있다면 이 양 집단(계급)은 사실상 같은 ‘사회계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행위자나 집단이 유사한 계급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언제나 동일한 이해관계(interest)를 공유하는 ‘계급’으로 뭉치고 그로 인한 계급갈등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한 계급이나 사회계급을 형성하는 기제에는 동일한 상황(계급상황; 시장상황)을 공유하는 전제만큼이나 그러한 상황에 대한 상징적 인지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베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집단들의 이러한 통합이나 교류에 의해 사회계급이 육체노동자(반숙련공), 프티 부르주아지, 화이트칼라/기술/지식인, 사업가/자본가/교육특권층, 이렇게 네 가지로 수렴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부르디외가 계급 범주와 경계의 존재가 사회적 투쟁의 내기물임을 강조했다는 것은 사회계급이 단지 기호적인 차이로만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차이의 인식에 의해 적대적인 집단들로 분류될 수 있는 계급정치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사회계급이 연속적인 차이들로 파편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의 구조(자본 총량 및 구조, 궤적)에 의해서 갈등하는 집단들로 수렴된다고 보았다. 맑스주의도 현실의 다양한 계급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연속적인 적대적 집단들로 수렴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것이 맑스적 의미에서 진정한 계급이다. 이렇게 맑스와 베버의 사회계급론은 부르디외에게서 수렴, 종합된다.13
이런 맥락에서 부르디외는 계급투쟁의 문제의식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현재의 계급이란 상징적 투쟁의 결과다. 맑스에게서 계급을 연합시키기도 하고 분열시키기도 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쟁적 투쟁’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 의식과 행동의 변이’는 이 기제를 매개하는 변수가 된다(Edgell 2001 참조). 계급분파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양극화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계속적인 경향과 발전 법칙이 더욱 더 노동력으로부터 생산수단을 분리시키고 분산된 생산수단을 거대한 집단에 더욱 더 집중시키”(『자본』III)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사회는 점점 더 두 거대한 적대적인 진영, 서로 대립하는 두 거대한 계급으로 분열되어 나아간다”(『공산당 선언』). 물론 계급이분법(기본 계급들: 자본가와 노동자)이 계급분파들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디외 역시 『구별짓기』에서 중간계급 분석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면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이분법과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배/피지배 대립과 투쟁의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계급이분법(또는 양극화)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중간계급의 존재를 모두 수용하고 설명하려는 부르디외의 입장은 현대계급론의 경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장미혜 2002:122 참조).
오늘날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이 양극화 테제를 더 이상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Wright 2005 참조)에 비추어 볼 때, 부르디외의 관점은 고무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계급이분법은 개별 장들의 수준에서 관찰된다기보다는 전체 사회적 세계의 메타-권력 장의 수준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과 자원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다원적인 세력들 간의 투쟁은 중첩되는 여러 개별 장들의 구조에 의해서 다양한 전선을 그리게 마련이지만 궁극적으로 ‘구조적 상동성’에 의해 자본의 태환율을 놓고 벌어지는 전체 사회적 세계의 지배계급을 결정하는 동학과 연동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부르디외의 계급투쟁은 다층적인 투쟁을 설명하면서도 계급양극화의 문제의식을 수용할 수 있다.
6. 결론을 대신하여: 부르디외의 계급정치사회학과 지식사회학
부르디외 역시 맑스와 마찬가지로 설명과 구성, 분석과 해방, 이론과 정치의 이분법을 기각한다. 그럼으로써 이들의 계급사회학과 계급정치학은 분리되지 않는다. 계급 정의와 분류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정치적 전망을 투입하는 이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계급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간의 명백한 적대가 있다”(Bourdieu 2013:14). 하나의 사회적 집합체를 또 다른 집합체로부터 구분하는 경계에 대한 논증 자체는 (이미 사회적 위치에 기반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연동된) 정치적 갈등의 근본적인 형식이다. 가령 중산층과 같은 계급경계 자체가 이미 상징적 분류투쟁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계급투쟁’은 부르디외에게서 ‘상징적 분류투쟁’이 된다(Brawoy 2018 참조). 보다 구체적으로 이 분류투쟁은 자본의 가치형식과 정당한 자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투쟁이다(Swartz 1997:180).
맑스의 계급론도 기존의 자연화된 계급관계(또는 사회)의 변동을 폭로하고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계급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이론이다. 그의 계급정치학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대한 분석적 설명에 내재적이다. 맑스는 잉여가치 생산과 착취의 기제를 설명함으로써 계급갈등 또는 계급적대가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고 (결과적으로 혁명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승리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부르주아 계급 역시 계급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현상과 그 기제에 대한 설명은 단지 설명 그 자체로 남지 않는다. 특별히 맑스가 보여준 사회구조적 계급모순과 적대에 대한 분석은 정치적 전망과 구성을 포함하며 정치적 실천전략을 낳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부르디외의 계급사회학은 단지 무엇이 계급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설명적 답 - 부르디외는 이를 ‘계급 경계에 대한 사회학’이라고 비판했다 - 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회계급에 대한 설명 또는 묘사에는 그 행위자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 내기가 걸려있다. 행위자들은 지배를 맹목적으로 승인하는 구조의 수인 또는 문화적 꼭두각시(cultural dope)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적 의지만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사회적 공간, 즉 차이들의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 계급들은 가상적 상태로, 점선으로 존재하며,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만들어야할 무언가로서 존재한다”(2005[1998]:29). 계급을 구성하는 이론에 이 구성을 수행하는 모든 행위자들(특히 연구자들)의 위치와 자본을 포함시켜 분석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계급의 구성과 동원의 정치학을 구축한다.14
어떤 행위자 또는 집단들의 (공유하거나 하지 않는) 속성들을 통해서 계급범주를 구성하는 것은 “연구자의 지적인 결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론적 계급들”을 “실제적인 계급”들로 오해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특히 맑스의 오류였다. 공유하는 속성들을 통해서 사회적 공간의 모델을 구성하는 이러한 계급론은 맑스적 의미에서 계급투쟁을 위해 동원되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공간 안에서 인접성이” “통합성을 자동적으로 낳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2005:27). 이론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공간 안에서 집단들 간의 인접성이란 실제적 계급 통합의 “객관적 잠재성”일 뿐이다. 즉 이론적 계급이란 “개연성이 있는 계급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의도’를 규정한다”(2005:27).
“맑스는 다른 어떤 이론가들보다도 이론 효과(theory effect), 즉 알려지지 않고 인정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는 한 완전히는 존재할 수 없는 ‘실재(reality)’를 보이게 만드는(theorein) 올바른 정치적 효과(political effect)를 행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가 이 효과를 그의 이론 안에서 설명하는데 실패했다”(Bourdieu 1998:11). 맑스주의에서 정치적 목적 때문에 계급분석을 계급정치로 즉각적으로 변환하려는 성급함이 나타났다. 단순한 개연적 계급을 현실적 계급으로, 이론적 계급을 실제적 또는 실천적 계급으로 환원했던 것이다. 결국 맑스주의 이론은 “이론상의 존재를 실제상의 존재로, 혹은 맑스의 말을 빌리면 ‘논리상의 사물들을 사물들의 논리로 치명적인 건너뛰기’를 수행”했다(2005:27).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에서 사라진 질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맑스주의 계급론이 현실 사회 집단과 계급에 대한 이론적 구성을 융합시켜버리는 경향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계급의 정의를 내세워 그 구성원들의 ‘객관적’ (이론상의) 이해관계에 가장 부합하는 목적을 배정해버리는, 즉 계급을 동원하려는 의도적인 정치행위에 대한 질문이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계급 존재에 대한 신념을 생산하는 계급의 대변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학자들의 ‘객관적’ 분류와 행위자들의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분류 생산 원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탐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부르디외는 “자신이 구성하는 이론적 계급들이 성, 민족 등과 같은 다른 이론적 분류법(division)보다도 맑스적 의미에서 계급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실제적인 차이에 잘 부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Bourdieu 1998:11). “개연적 계급이 현실에 가깝게 구성될수록 정치적 동원 작업이 성공할 가능성 역시 높아지며, 이는 결국 계급 담론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이상길 2018:196).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부르디외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그는 기본적으로 계급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구성을 다른 계급론들(주관주의와 객관주의)과의 관계구조라는 장 내에서 벌어는 이론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투쟁으로 본다. 이러한 논리 역시 장 이론에 입각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계급의 존재는 (지역, 종족, 국적, 나이, 종교 등등과 같은) 경쟁적인 대안들에 맞서서, 또 그것들을 넘어서 지배적인 ‘사회적 전망과 분리의 원리’로 계급을 부과하기 위한 투쟁을 수반하는 집단 형성 작업의 결과다”(Wacquant 2013:40). 부르디외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학 장 또는 계급담론장을 상정하고 대립되는 입장들 속에 자신의 위치를 제3의 대안적 위치로 설정한다고 볼 수 있다. 학문 장 속에서 정치적인 투쟁(정치 장의 논리)과 인식론적인 투쟁(과학 장의 논리)은 실제로는 구별되지 않고 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 이론적-정치적 투쟁을 통해 생산된 지식(계급론)은 사회적 정당성과 진리값을 획득할 수 있고 그 결과로 동원의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즉 “계급 담론의 진실성”, 또는 진정성은 일차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학문 장 내의 이론적 성취(분류투쟁)의 효과이고, 학문 장의 경계를 넘어서 권력 장 또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결과를 통해 확인된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의 존재는 장의 존재와 연동된다. 달리 말해, 계급은 관계적 차이들의 공간에서 생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범주다. 그리고 실체론적 개념으로 오해될 수 있는 ‘지배계급’에 대한 설명은 ‘권력 장’ 내의 구조와 세력관계의 효과로 대체된다. 따라서 계급 범주나 정의에 대한 경험적인 분석에 권력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투쟁의 계기가 포함될 수밖에 없게 된다. 또 이에 따라 지배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데, 지배가 “강제력을 가진 일단의 행위자(‘지배계급’)가 수행하는 행위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는 다양한 제약의 네트워크 내에서, 그에 의해서 발생하는 행위들이 복잡하게 결합한 간접적인 결과”가 된다. 지배자들 역시 “다른 지배자들로부터 여러 제약을 경험하며 이렇게 지배구조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Bourdieu 1994:57; Wacquant 2013:43n에서 재인용).
모든 이론적 구성물은 정치적 구성물이며, 모든 이론적 실천은 정치적 실천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이 양자를 분석적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한계를 해명하면서도 이 양자가 궁극적으로 동전의 양면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부르디외는 ‘과학적 구성물’로서의 사회계급과 ‘실제로 동원되는’ 사회계급을 구별하고, 사회계급의 모델을 구성하는 행위가 실제 사회계급이라기보다는 ‘개연적 계급들(probable classes)’의 이론적 재현을 생산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Swartz 1997:148). 이런 의미에서 사회계급을 구성하는 이론적 작업이자 동시에 사회계급을 동원해내는 정치적 작업은 어떤 집단들 간의 이론적 근접성을 찾는 일이며, 이는 또한 이론적 근접성에 기초하여 전체 사회적 공간 안에서의 사회적 연대 또는 계급연대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관계적 사유를 통한 계급사회학은 미시적 상황주의나 의사소통적 교환만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대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기획을 포함하는 정치학이다. 즉 사회적 공간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근접성을 문제삼고 새로운 근접성을 구축 또는 발명하는 행위인 것이다.
실제로는 현실적 교환과 상호작용을 연구하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본질주의와 단절하고 관계적인 사고를 도입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사실, 시질적인 경쟁이 그렇듯이, 직접적인 접촉 및 상호작용 - 근접성 - 과 연계된 실질적인 연대는 이론적 공간에서 근접성에 기초한 연대를 구축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Bourdieu 2014:286).
기존의 상호작용론은 ‘사회적인 것’ 또는 ‘유대감(solidarity)’이 면대면의 관계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소위 사회가 개개인의 관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본질주의를 피할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격적 근접성의 본질주의에 빠진 것이다. ‘사회적인 것’ 또는 ‘사회적 연대’가 단순히 면대면 상호작용이나 기존의 익숙한 근접성에 입각한 사회적 관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적 공간 안에서 재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의의 계급사회학은 집단형성의 정치사회학이자 계급론들에 대한 메타 계급론이며 기본적으로 그의 성찰적 사회학의 기조를 따른다. “진정한 사회과학자라면 계급들이 확정될 수 있는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한편, 그 공간이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상길 2018:197). “집단형성의 고유한 정치적 작업은 우리가 일련의 상징적 무리 짓기 기법과 요구형성의 도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기법과 도구들이 [사회적] 경계를 구획하고 강제한다. 그리하여 일군의 사람들이 집합체로 만들어지고, ‘종이 위의 계급’이 실제의 계급으로 바뀌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하게 된다”(Wacquant 2013:40). 이것은 “정치 실행자들이 허구적으로 합리화된 통치의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조사기법과 분석용어를 전유”하는 “상징조작 노동”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이 상징조작을 독점하는 주요 집단이 지식인이라는 점이다(Wacquant 2013:40). 따라서 연구자들의 “군주를 정의하는 야망”(경계를 다스리기, 성스러움을 다스리기), “연구자들의 인식론(gnoseology)을 출현시키는 정치적 야망”, “행위자들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분류하려는 야심”, “본원적 직관”을 객관화해야한다. “연구자는 타자들을 이런저런 집합에 집어넣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주장하는 의도를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Bourdieu 2014:305). 왜냐하면 행위자들 역시도 분류투쟁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계급과 싸우는 다른 모든 행위자들처럼 연구자 자신도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생산의 장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Bourdieu 2014:306). 그러므로 계급분류에 개입하는 모든 행위자들의 이론적 - 동시에 정치적 - 실천에 대한 지식사회학에 다름 아니다.
참고문헌 (생략)
1 발표용 초고(draft)이므로 학술적 인용을 삼가바랍니다. 문의 hyunjun79@daum.net
2 부르디외가 궁극적으로 배타적인 전통에 헌신하는 맑스주의자인지, 아니면 베버주의자인지, 뒤르켐주의자인지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디외는 이론들 간의 허구적인 대립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베버주의 이론 사이의 대립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의 양자택일 만큼이나 허구적인 또 다른 양자택일을 구축한다”(Bourdieu 2013:14). 다만 이러한 소박한 우문을 발견과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유용하다. 대개 우리의 연구는 소박한 질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1987:63-64)는 “with ~ against ~” 표현을 사용했다. 맑스를 따라 그와 함께 사유하면서도 맑스에 반대하고, 베버를 수용하면서도 베버에 반대하며, 뒤르켐 따르면서도 뒤르켐에 반대하는 것을 추구했다. (이러한 태도를 따라 필자 역시 부르디외를 따르면서도 부르디외를 비판하고 싶다) 이러한 태도를 ‘비판적인 계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는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있지만, 그 누구의 제자도 아닐 수 있다. 부르디외는 매번 그러한 전형적인 기대를 배반하며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서 부르디외는 맑스, 베버, 뒤르켐 등을 절묘하게 결합했다(Wacquant 2013:41 참조). 예컨대 종교(장)의 발생, 구조,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맑스주의와 뒤르켐의 사회인식론, 베버의 ‘구원의 경제’ 등을 종합했다(Bourdieu 1991; Dianteill, 2003; Rey 2007: 75 참조).
한편 바캉(Wacquant 2013:41n)은 자신의 스승을 ‘뒤르켐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면서도 부르디외의 계급 개념 재구성이 “통상적인 이론적 분파들-마르크스주의, 베버주의, 뒤르켐주의, 포스트계급주의 분석-을 가로지르고 또 앞서 나간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분파들 사이에 부르디외를 끼워 넣으려는 에릭 올린 라이트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슈워츠(Swartz 1997)는 부르디외가 사회계층을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전제하고 사회계급간의 갈등보다는 지위집단간의 경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맑스보다는 베버에 더 유사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뒤르켐이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뒤르켐 및 구조주의 전통과의 친화성을 강조하는 입장(Lane 2000)이 있다. 특히 뒤르켐의 인식론과 방법론은 부르디외의 저작 전반에 흐르고 있다. 뒤르켐의 사회실재론과 과학적 입장은 부르디외의 인식론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부르디외는 뒤르켐 역시 비판했다.
이 외에 베버와 맑스의 중간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Bidou; Hardil)이 있으며(이상호 2002:123n 참조), 리자르도(Lizardo 2004)와 반덴버그(Vandenberghe 2009)는 프랑스 과학철학의 인식론적 전통을 강조하는데, 특히 반덴버그는 바슐라르의 합리론과 카시러의 관계론의 종합으로 형성되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 맑스, 베버, 뒤르켐 등을 따르고 또 따르지 않는지를 섬세하게 고찰함으로써 부르디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증진시켜야 할 것이다. 고전사회학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는 수센과 터너(Susen & Tuner 2011)를 보라.
3 사회구조와 상징구조, 계급구조와 인지구조의 조응을 통한 상징적 지배는 세계에 대한 상징적 인지를 통해서 작동하는 복종의 논리, 즉 상징폭력의 문제설정으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대상계급’, ’대타적 계급’으로 표현되는 피지배계급은 자충적인 대항논리(언어)를 개발할 수 없기에 상징적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한 피동적 존재”로 보인다.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다시피, 적극적인 투쟁전략을 실천하는 민중계급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회학적 리얼리즘”인가, 아니면 “지배 중심주의의 그늘진 비관론”인가? 이상길(2018:244-248)을 보라.
4 물론 부르디외의 변형된 맑스주의적 문제의식에서 생산은 더 이상 착취에 기반한 맑스주의적 생산 개념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에릭 올린 라이트를 비롯한 분석 맑스주의자들도 이 양 패러다임을 매개, 중재,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5 부르디외가 베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Brubaker 1985; Lash 1993; Swartz 1996; Vandenberghe 1999; Fowler 2000; Dianteill 2003; 최종철 1996b; 현택수 2002; 이상길 2002; 이상호 2002; Verter 2003; Rey 2007 참조). 그는 베버의 종교사회학을 “굴절(refraction)”(Rey 2007: 73)시키고 “비판함으로써 진일보”(Rey 2007: 90)를 이루었다. 특히 장(field), 일루시오(illusio), 상징자본(symbolic capital),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과 같은 부르디외의 주요 개념들은 베버와 뒤르켐의 종교사회학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홍성민 2004: 60)해낸 결과였다. 그리고 그는 베버처럼 그의 이론을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세적 모형에 적용”(Verter 2003: 156)함으로써 이론의 설명력을 높이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 학자들(Robbins 1991; Swartz 1997; Weininger 2005)은 부르디외를 베버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다.
6 “확장된 계급 개념은 계급 위치와 이해와 계급 갈등에 의해서 추진되는 사회 변화의 역동성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약화된 계급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Hout, Brooks & Manza 1993)”(장미혜 2002:122).
7 그러나 구해근은 부르디외의 계급론이 문화적 요소를 너무 강조하고, 아비투스 개념은 마스터 변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또한 한국사회에는 계급문화가 성숙―차별화―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의 분석 모델을 한국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계급 간의 차별적 행위는 아비투스를 매개로 하기보다는 물질적 자원(경제적 자본)의 소유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아야”(2007: 268)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해근은 함인희(2001), 조은(2001), 장미혜(2002), 최샛별(2006), 한신갑(2007), 남은영(2007) 등을 참조하여 “계층 집단 간에 발견되는 문화적 취향의 차이는 다분히 물질적인 성격의 것이며 비교적 단기간에 취득될 수 있는 소비 행위나 생활양식인 것으로 보인다”(2007: 268)고 보았다. 또한 그는 부르디외식 접근법이 정치경제학적인 분석이 약하다는 단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단점들을 고려하여 부르디외식으로 계급을 자본의 총량과 구성비에 의해 정의하되, 이 자본들의 구체적 내용과 분배과정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한국사회의 계급분석 모델로 택하고자 했다. 즉 이는 개인이 차지하고 있는 계급 위치는 ①자본의 총량과 구성비, ②정치경제 구조 내에서의 위치―사실상 직업―로 결정된다는 것과, 이 계급 위치가 계급 실천을 통해 어떻게 '사회적 계급(social class)'을 형성해 가는가를 설명하는 모델이다.
8 물론 부르디외의 사회적 공간이라는 메타포는, 베버의 ‘생활 세계의 유형’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았다(홍성민 2002:34).
9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에 대해서는 무젤리스(2003:217-231), 젠킨스(1991:61)를 보라.
10 라일리(Riley 2017:13-14)는 부르디외가 (특히 『구별짓기』에서) 계급 개념을 과장함으로써 특정화하는 데에 실패했으며 다양한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발생적 기제”로서 아비투스가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는 데에도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라일리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어떻게 사회계급이 “모든 관여적 속성들 간의 관계들의 구조(the structure of relations between all the pertinent properties)”를 통해서 정의되거나 만들어지는지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부르디외는 사회계급을 만드는 이 관계들의 구조를 경제(자본)와 문화(자본) 간의 상동성으로 설명하지만 이 역시도 해명되지 않았으며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의 관계도 모호하다고 비판했다.
11 사회적 실재들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베버의 ‘선택적 친화성’ 개념에 영향을 받은 ‘구조적 상동성’ 개념은 제프리 알렉산더가 부르디외를 맑스주의적 경제결정론, 경제환원론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이상길 2018:222n 참조). 과잉결정 기제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는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나 경제자본의 힘, 또는 경제 장의 ‘최종심급’을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 보자면, 장의 ‘상대적 자율성’도 경제 장의 지배력 또는 경제적 토대의 종속에 대한 수사일 뿐인 것이고 따라서 부르디외는 알튀세르와 유사성(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1995:157-164)를 보라. 하지만 경제 장의 지배력은 초역사적인 법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자본의 태환율과 축적의 우위에서 설명적 특권을 갖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이상길 2018:223 참조). 예컨대 경제 장(논리)의 지배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상대적인 자율성을 획득한 각각의 장에서 경제자본은 (노골적인) 경제(자본)를 부정하는 - ‘반경제적 경제’를 통해 - 다른 자본들(완곡화하는 상징적 논리)을 통해서만 축적된다.
12 홍성민(2002:37)은 알튀세르와 부르디외를 비교, 대조하면서 양자가 모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는 일치하지만, 부르디외에게는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적대 관계에 대한 전제가 보이지 않”으며, “계급재생산이 강조되고 있을 뿐 사회적 변동에 관여하는 계급 투쟁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하에서 주장하다시피, 맑스의 계급 적대와 투쟁의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성민(2002:38)은 부르디외의 사회구성체가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부르디외의 논문 “종교적 장의 발생과 구조”에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의 대립이 사제/예언가의 대립으로 치환되고, 경제적 소유 관계를 축으로 하는 계급 갈등은 특수한 이해의 대립을 낳은 상징적 질서의 갈등으로 바뀌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부르디외의 이러한 베버적 “치환”이 계급 투쟁의 문제의식을 희석시켰다고 보지 않는다. 부르디외 입장에서 보자면 각각의 장들에서 벌어지는 상징적 대립은 계급 범주를 구축하거나 해체함으로써 계급 갈등을 정치적 공간으로 만드는 힘이다. 즉 오늘날의 세계에서 계급투쟁은 여러 사회적 영역들에서 펼쳐지는 상징투쟁(들)이다. 다만 부르디외가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계급론을 경제적 잉여가치의 착취와 생산력(의 변화)에 근거해 설명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또 홍성민(2002:38)의 평가처럼 부르디외외가 알튀세르와 달리 “경제적 생산관계와 정치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맑스주의의 틀을 벗어났다고 볼 수는 있다. 이 외에 부르디외에 대한 알튀세르의 영향과 양자의 공통점에 관해서는 홍성민(2000: 9장)과 슈워츠(Swartz 1997:40), 라일리(Riley 2017:107)를 보라.
13 랜들 콜린스(1985)는 맑스와 베버를 묶어 갈등론으로 유형화한 바 있다.
14 부르디외를 손쉽게 맑스주의자로 간주해 버리는 경향도 상당히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세계(장)를 자본을 놓고 끊임없는 벌어지는 투쟁과 갈등의 공간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사회변동의 동력이 된다고 보는 점에서는 다분히 맑스주의적이다. 특히 한국의 사회학계는 부르디외를 비판적/실천적 맑스주의자나 ‘참여지식인’으로 간주해왔는데 이미 여러 학자들(홍성민 2000; 이상길 2011, 2018; 김현준, 김동일 2011)이 이 현상을 비판적으로 조명해왔다. 이러한 ‘한국적’ 관점은 그 근거에 대한 면밀한 이론적 검토의 결과라기보다는 부르디외의 급진적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참여적 이미지의 산물로 보인다. 물론 부르디외를 “계급문화분석”으로 이해하면서 맑스주의적으로 전유하려는 접근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라는 “전형적인 답지가 주어졌을 공산”(이상길 2018:485)이 컸던 이유, 즉 부르디외를 맑스주의와 쉽게 동일시했던 이유는 프랑스 사회에서 드러난 부르디외의 정치적 실천이나 태도와 한국 지식인들의 정치사회적 실천의 친화성 내지 행태적 유사성을 즉각적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배와 계급문제를 중시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공중을 설득하기 위한 부르디외의 실천과, 한국의 비판적 사회학자들의 실천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매우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들은, 부르디외의 실천을 ‘상아탑’ 지식의 무용론을 주장하거나 학문연구보다는 자신의 비학문적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알리바이로 사용했다) 물론 우리는 사회학자로서의 그의 업적과 활동에서 맑스주의적 사회운동과 유사한 정치적 함의를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이상호 1994; 이기현 1996; 김호기 2001; 현택수 1996; 2002; 홍성민 2002; 2004 참조). 또 그의 이론에서 맑스주의(또는 맑스주의 문화연구)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부르디외의 오인, 상징폭력, 일루시오 개념은 베버나 뒤르켐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핵심 개념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으며 사실상 부르디외의 저작 전반에서 맑스주의의 용법을 대체한다(부르디외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상징폭력’ 개념을 사용한다). 또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는 그의 태도는 맑스와 거의 유사하다(Dianteill 2003: 530; Rey 2007: 91 참조). 그러나 이상길(2011: 269)은 부르디외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줄곧 비판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왔고 한때 가시 돋친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를 맑스주의자로 보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다.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세계사상〉주간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 나를 두고 마르크스주의를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계급갈등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박재환, 1997: 270 재인용).
이 글에서 부르디외와 맑스주의 핵심이론 전반을 체계적으로 비교하지는 못했다. 특히 자본 개념과 관련해서 그러한데, 데즌(Desan 2013)은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이 맑스의 그것을 확장함으로써 맑스의 경제주의를 극복했다는 견해를 기각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맑스의 자본 개념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한편, 부르디외가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취하고 확장함으로써 ‘비정통적 맑스주의’에 기여했다는 주장(Flowler 2011)이 있으며, 인식론과 방법론의 차원에서 부르디외가 맑스주의적 실재론에 가깝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Vandenberghe 2009 참조). 이 외에 부르디외와 맑스주의를 (문화)자본과 (잉여)가치의 문제에서 다룬 연구로는 비슬리-머래이(Beasley-Murray 2000)를, 전반적으로 비교/대조한 연구로는 뷰러웨이(Burawoy 2018)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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