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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르디외의 정치사회학 일반이론과 방법론: 대의/대표/민중론을 중심으로
    Articles (draft version) 2022. 3. 18. 11:49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결과보고서 일부 

     

      정치란 정치적 이데올로기생산의 장과 하비투스 간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장과 하비투스, 자본 개념 등으로 구성된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이 간과하는 경험적 측면을 잘 포착할 수 있고 보다 일반적인 정치 분석에 기여할 수 있다(Lane, 2006).즉 정치적 실천을 정치장과 정치하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부르디외의 이론은 민주화세대의 정치적 실천을 민주정치 장(87체제와 정당질서)과 운동권 하비투스의 관계에 입각해 분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른바 민주화세대의 '신체에 새겨진 사회구조'를 역사적•담론적 자료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장들 간의 관계성을 이론화하는 메타-권력장과 구조적 상동성,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은 현재 정치장과 그 하위 장(정부와 정당)들의 관계를 전체 사회영역과 민중•민주화 운동진영, 시민사회 등과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데 유효한 모델을 제공한다.  
     
    1) 재현/표상 이론: 현대 민주주의(대의제)에서 위임, 권력, 정치적 주체화의 역설
     
      ‘대표’는 기본적으로는 누가 누군가를 대신한다는 뜻이다(이관후, 2016: 2). 이관후에 따르면, 서구 대표제의 통치 형태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개인(들)이나 집단을 ‘재현’한다는것이다. 이것은 대표하고 대표되는 주체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둘째, 대표하고 대표되는 사람들이 관철하고자 하는 어떠한 실체가 있다는 점이다. 즉, 한 주체가 다른 주체(들)을 대표할 때에는 이익, 의지, 주권, 재산권 등의 구체적인 가치들이 실체로서 결합한다. 셋째, 형식상의 대표(descriptive representation)가 아니라 실질적인 대표(substantive representation)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대표자(들)가 단순히 누군가를 ‘대신(standing for)’하는 것 뿐 아니라 대표되는 사람들을 ‘위한 행위(acting for)’를 해야 한다.(이관후, 2016: 3)
     
    이러한 논리에 따라 "현대의 정치적 대표는 대체로 다음의 6가지 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권위성(authorization),책임성(accountability),서술성(thedescriptive), 실질성(the substantive), 상징성(the symbolic), 반응성(responsiveness)이다"(이관후, 2016: 3). 보다 구체적으로보면, 
     
    대표자는 정치적권위를 갖는다. 권위를 부여하는 형식과 부여된 권위의 내용이 확정되어 있는 경우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 외의 많은 경우에도 대표자는 어떠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정받곤 한다. 또한 대표자는 대표되는 사람들에대해 특정한 정치적 책임을 진다. 정치적 대표를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볼 때 ‘권위’가 베버의 분류에서 전통적 지배에 속하는 것이라면, ‘대표-책임’ 관계는 현대 정치에서 정치적 대표의 의미와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다. 그리고 대표자는 현재 그가누군가를 대표하고 있다는 ‘서술적’ 사실에서 대표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 대표자는 ‘실질적’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의사나 이익을 위해서 행위할 때만 대표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또한 대표하는 사람이나 물체는 대표되는 사람들의 실체나 정체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상징성은 대중들에 게 정치적 대표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종종중요한 정치적 사건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이관후, 2016: 4).

      문제는 현대정치체제에서 대표제가 민주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문제점이나 모순들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베버의 관점에서 "근대의 정치적 대표제는 민주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정치 형식이었다"(비에이라 & 런시먼, 2020: 102). 이러한 정치형식은 잠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따라서 베버를 위시한 이론가들은 "대의제 정치의 본성이 대의제 정치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103).
      부르디외는 "개인들이 집단을 구성하는 대가로 그 집단에 대한 통제를 잃는" "정치적 물신주의", "정치적 소외"의 은폐된 과정을 분석한다(1982/2014: 247). 부르디외는 여기에서 뒤르켐을 언급하며 위임된 권력이 권력을 준 사람들 개개인을 초월하는 사회적인 것임을 말한다. "한 사람이 한 무리 사람들의권력을 위탁받았을 때, 그는 위임자들 각자를 뛰어넘는 권력을 지닐 수 있다"(246).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 민주정치는 표상/재현/대리라는 은폐된 원초적 순환메커니즘(상징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민주정치의 위기의 문제인 정치물신화와 민중의 정치적 소외 또는 박탈(dispossession)은 정치가 이 매개를 통해서, 사실상 매개를 만드는 대리자를 통해서 권력이 위임되기 때문이다. "대표하는 자가 그를 대표자로 만든 집단이 되는 것은 재현/대표에 의해서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에 대해, 구호의 마법에 힘입어 말하고 행동할 전권을 부여받은 대변인은 이러한 대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집단의 대체물이다"(313).
      부르디외의 정치학은 '위임(delegation)'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위임이란 기본적인 정의상으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주는 행위이다"(1982/2014: 245). 부르디외에 따르면, 조직 구성원들 전체를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대표자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나 대표자의 발언을 통해서이다. 문제는 위임이 대리자에게 위임자(민중)의 대리권을 주어, 위임자로부터 대리인에게로 권력의 전권(plena potentia agendi)을 이전하게 된다는 것이다(245). 여기까지는 대의제 정치학의 상식인지도 모른다. 
      하야트(Hayat, 2019)는 정치학의 대표 이론에서 '구성주의적 전환(constructivism turn)'의 규범적 함의와 두 가지 이념형을 논하면서, '구성(composition)으로서 대표' 이론(Pitkin)이 대표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강한 민주적 기준을 제공하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권력 관계를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하면서 부르디외의 지배사회학을 대안적으로 제시했다. 구성주의자들은 대표자가 자신들의 이해관심과 의견을 위임자의 이해관심과 의견에 부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대표자와 위임자 간의 권력관계를 경시한다. 아울러 그들은 위임자의 정의에서 사회집단들 간의 권력관계와 추후 삭제되는 피지배집단을 고려하지 못한다(124). 반면에 부르디외는 '임명(imposition)으로서의 대표' 이론을 제공함으로써 민주적 담론 뒤에 숨겨진 권력관계, 대표와 위임인 뒤에 숨겨진 권력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위임이 단순히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리자에게 기능과 임무를 삭제하면서 권력을 건네준다는 것이며, 나아가 권력을 준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245-46). 다시 말해 위임은 권력을 준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권력의 본성이 그것이 수행해야할 기능과 임무의 삭제를 동반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구체적인 현실 정치에서 대리인(정치인)의 어떤 기능과 임무가 삭제되는지 대리인의 권력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부르디외는 위임자와 대리자 사이의 관계는 위임이 만들어 내는 역설을 감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위임이 만들어 내는 역설"이란 위임자와 대리자의 관계가전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면적으로는 한 집단(위임자)이 대리자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리자가 집단(위임자)을 형성한는 것이다. "대표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표가 대표(라는 상징적 행위를 수행)하기 때문에, 대표되고 상징되는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고, 대표를 한 집단의 대표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246). 이것은 순환적인 메커니즘이다. 이를 통해 대리인이 카리스마(베버)와 마찬가지로 "자기 원인(cause of itself)"으로 나타난다(246). "대리의 신비는 어떤 사물 또는 사람을 원래와 다른 무엇으로, 즉 스스로를 인민이나 노동자같은 사람의 집합이나 당, 교회, 국가, 민족 같은 사회적 추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는 자(장관, 주교, 대표, 국회의원, 사무장 등)로 만들어 주는 저 사회적 주술들 가운데 하나이다. 대리의 신비가 절정에 이르는 것은 집단이 그것을 대변해 줄, 즉 그것을 위해, 그것을 대신하여 말해 줄 대변인에게 위임을 통해서만 존재할 때이다. 순환은 이제 완벽하다. 집단은 그것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를 통해 만들어지면, 그리하여 그가 권력의 진정한 기초인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권력의 기초로 나타난다"(313).
      이 순환적인 정치와 지식생산의 메커 니즘 속에서 대리인은 자신을 스스로 집단(위임자들)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을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변인은 그의 권력을 생산하는 것의 원인이다.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집단은, 그가 그 집단을 구현하기 위해 거기 있지 않다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말이다(246).  
      이러한 위임의 역설 또는 이율배반은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언제나 정치적 소외를 무릅써야한다"는 사실에 있다(247). "정치에는 이율배반이 내재하는데, 이는 개인들이 그들이 가진 게 없다면 더욱 더 - (그들이 구성한 것을) 대변인에게 빼앗긴다는 조건에서만, 집단으로서, 즉 말할 수 있고 자신의말에 귀 기울이게 할 수 있으며 이해받을 수 있는 세력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247). 즉 현대 민주주의(대의제)의 정치적 주체(개인과 집단)는 그들의 권력이 대리인에게 빼앗긴다는 조건(을 스스로 구성해 가는 주체화 과정 - 이것을 주체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하에서만 정치적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소외의 문제는 곧정치적 주체(화)의 역설이다. 즉 정치적 주체화는 정치적 소외를 그 조건으로 하고, 정치적 소외는 위임을 그 원인으로 가지는 셈이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와 소외의 생산과정은 정치적 물신을 낳는다. "정치적 물신은 사회적 행위자들 덕택에 존재하게 되었는데도, 저 혼자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사물들, 존재들이다"(247). 흥미로운 것은 이 정치적 물신을 위임자(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창조물로서 사랑하게 된다는 점이다. "위임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창조물을 사랑한다. 정치적 인물들 속에 있는 가치, 이 인간 두뇌의 산물이 인격의 신비로운 객관적 속성으로, 매력으로,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직무(ministerium)가 신비(mysterium)로 나타난다"(247-48).  
     
    "위임이라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이 원초적 설립행위는 다수 사람들의 집합, 또는 병렬된 개인들의 연속에불과하였던 것을 법적 인격으로, 하나의 법인체(corporatio)로, 몸체로, 사회체 속에 구현되어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몸들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몸체로('corpus corporatum in corpore corporato') 만드는 주술행위이다"(253).
     
    래인(Lane, 2006)에 따르면,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정치개념의 핵심은 사회집단이 그들의 객관적인 계급적 위치에 대한 집단적인 의식 각성을 통해 정치 세력에 동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단의 정체성은 사회적 세계의 자의적인 새로운 관점과 분류를 부과하는 임명(imposition)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명의 행위(act of nomination)'는 묘사한 바로 그 현실을 생산하는 것으로 수행적으로 작용하여 잠재적으로 정의된 지역이나 계층의 경계에 속한 모든 행위자를 동원하여 정체성을 갖는 정치집단으로 변형시킨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나 지역주의와 같이 사회세계에 대한 이론이 사회세계의 집합 표상을 변화시키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사회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부르디외는 '임명 효과'라고 불렀다. 즉 임명 행위는 집단을 동원하는 상징적인 구성 행위이며, 사실상 수행적인 '이론 효과(the theory effect)'인 것이다(Bourdieu, 1982/2014:181; Lane, 2006: 56). 
      부르디외는 위임의 조직사회학적 차원도 언급한다. 이런 차원에서 위임은 "상설조직과 상근자"는 물론이고, "인감, 약칭, 서명, 서명이 있는 위임장, 스탬프 등을 갖춘 사무실"과 "사무국"을 구성하는 행위이다(248).어떤 집단(위임자)의 존재는 집단이 전권과 공증된 인감을 갖는 상설적인 대표조직(사무국)을 갖추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계열체)을 대신할 수 있을 때 존재한다(248). 이 대표조직의 사례가 바로 정당이나 교회이다(248). 
      전권을 가진 대표를 임명하는 것은 더 이상 위임인이 아니라, 사무국(정당)이다(249). 부르디외에는 여기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은폐된 위임의 두 번째 행위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 블랙박스를 종교에 빗대어 두 단계로 고찰했다(249). 이는 교회가 평신도들을 대리해 성직자(종복)에게 위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첫째 과정에서는 사무국이 원자화된 주체들을 대신한다. 두 번째 과정에서는 비서가 사무국을 대신한다. 


      정리하자면, 평신도들은 교회가 대리하고 교회는 성직자가 대리하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교회는 성직자가 교회를 대신해서 행동할 권한을 부여하고, 성직자는 교회를 대신해서 행동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교회는 구원재의 정당한 독점권을 갖는다. 부르디외는 성직자, 즉 대표가 "집단의 일부"이면서도 그 전체의 "존재를 지시하고 표현하는 수동적, 객관적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49). "기호가 지시된 대상을 만든다"(250). 기표는 표시된 집단을 표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표시된 집단에게 존재하도록 지시한다(250). 기표는 "표시된 집단을 동원하면서""존재하도록 불러오는 권력"이다(250). 그 결과 "기표는 기의와 동일시된다"(250). 예컨대 시위가 그렇다는 것이다. 대변인이 "'내가 대표하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대표자라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대변인은 "그에게 위임장을 준 사람들을 현시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현시하는 것이다"(250-51).이 때 대변인은 그 자신이 바로 집단의 현시이기 때문에 권력을 갖게 된다. "'자기 뒤에' 그 집단이 있다고 믿게 만들수 있"는 것이다(252). 그래서 집단(민중)이라는 사회적 실재에 접근하려면 대변인을 통할 수밖에 없다. 부르디외는 이 대변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부 또는 관리자층(cadres)을 제시했다. 이들은 원자화된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사회적 행위자(법인)로 존재하게 해준다.
      부르디외는 수임인(대표)이 스스로를 승인하는 데 사용하는 "보편적"인 "구조적" "자기 기만" 전략(상징폭력)을 역시 가톨릭 사제와 '신탁효과'를 들어 설명한다. 그것은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수임인이 "어떤 점에서 집단 속에서 스스로를 지우고, 자신의 인격을 집단에 바치며, '나는 집단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부르짖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253). 여기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전략이 겸손이다. "수임인의 월권은 불가피하게 겸손하다. 그것은 겸손을 전제로 한다"(253). 그리하여 사제는 봉사자라는 겸손한 칭호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봉사를 그들에 대한 지배로 변형한다(254). 
      이러한 위임의 상징폭력 메커니즘을 부르디외는 홉스와 니체를 차용하여 설명한다. 홉스의 "대표에 의한 단일화 이론"에 따르면, "고립된 개인들의 무리가 법적 인격의 지위에 접근하려면, 대표자가 제공하는, 그들의 다양성에 대한 통일된 표상 속에서, 법적 인격의 단일성을 구성하는이미지를 발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단일한 대표 속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를 하나의 단위로 구성해야 한다"(255). 또 홉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 다중은 한 사람 또는하나의 인격에 의해 대표될 때 하나의 인격이 된다 ... 하나의 인격을 이루는 것은 대표자의 통일성이지 피대표자의 통일성은 아니기 때문이다"(Hobbes, 1996/2008: 221; 비에이라 & 런시먼 ,2020: 63에서 재인용). 즉 홉스는 "대표의 단일성에서 생겨나는 통합효과"를 강조한 것이다(255). 주지하다시피, <리바이어던>은 본래 법인격으로서 국가탄생의 원리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87년 민주화체제라는 정당한 국가체제를 어떻게 민주화운동세대가 대표/대리하게 되었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니체의 <반 그리스도>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가톨릭 신앙의 위임을 통해 대표성을 성육신(incarnation)화하는 가톨릭 사제(대표)에 대한 비판이다(255). 보다 구체적으로 사제와 같은 대표자 또는 중개자가 자신을 꼭 필요한 존재로 보이게 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니체가 "신성한 존재로의 자기 변형"이라고 말하고, 부르디외가 "비인격적인 헌신 전략"이라고 표현한 그것은 대표자자신이 생산하는 어떤 생산물에 대한 욕구를 생산하는 것이다(256). 그리고 대표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산해야 한다. 이 어려움은 어려운 만큼 신성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자는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이며 신성한 의무를 만들어 이에 대한 헌신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256). 니체에 따르면, 사제는 "자기의 의지를 신이라고 일컫는" 자이다(257 재인용).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치가란 자기의 의지를 인민, 여론, 나라라고 일컫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57). "니체가 말하려는 바는 위임받은 자들이 보편적 가치들을 자기들에게 귀착시킨다, 가치들을 자기네가 전유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을 징발한다'. 그리하여 신, 진리, 지혜, 민족, 신탁, 자유 등의 관념을 독차지한다"(257). "성직자는 신 또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지워 버림으로써, 스스로 신이나 민중이 된다"(257). 이러한 '신탁효과'의 결과는 "인격의 분열"이다(257). 즉 자아는 초월적 인격을 위해 말소되고, 일상적 개인은 죽어서 제도가 되어야 한다(257-58).    
      마치 복화술사처럼 대표자(정치인)은 민중의 이름으로 말하는 권리를 승인받으면서 민중이 된다. "정치인이 '민중, 민중계급, 인민대중 등'에 대해 말할 때," "메시지와 메시지의 해석을 동시에 생산"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민중의 삶이자 진실"이 되어, 민중을 단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민중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258).
      결국 "신탁효과는 허가받은 대변인이 그에게 허가를 내준 집단의 권위에 기대어, 인정된 강요를, 상징폭력을, 집단의 고립된 성원들 각각에게 휘두르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259). 대변인은 자신의 특수한 이해관심을 집단의 공인된 이해관심인 것처럼 하기 위해서 그것을 추상적 언어를 사용해 '보편화'한다(260).     
      부르디외에 따르면, 여기에는 "이중의 나(이중의 게임)" 논리가 있다. 하지만 대변인의 이중게임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대리의 핵심은 이것인 '정당한 기만'이라는 것에 있다(262). 정당한 기만은 대리자가 의식적으로 민중을 속이는 냉소적인 이익추구자가 아니라, "진지하게 자기를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착각하는 사람일 때만 성공할 수 있다"(262). "정치를 위해 살아야만 정치로 먹고 살 수 있다"(213). 다시 말해 이 메커니즘은 "완전한 순진성 속에서, 완벽히 진지하게 작동"하는 것이다(262). 
      부르디외는 이러한 이중게임의 메커니즘을 "순수성의 정치"라고도 표현한 바 있다(1996: 342). 이것은 정치적 투쟁이 자율적 장이 부여한 특수한 권위와 하비투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태를 표현한 것이다(김현준 & 김동일, 2011 참조). 에밀 졸라와 같이 윤리적 순수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획득한 지식인의 정치적 개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를 우리의 사례에 비추어본다면, 민주화운동세대의 자율적 장은 87년 민주화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장과 일부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화운동세대는 민중•민주화(운동)를 의식적으로 사칭하고 이익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성공적인 자기 기만을 통해 민중•민주화(운동)를 효과적으로 대리했다.  
      다시 말해, 대표자의 이해관심(자기 기만)이 특정한 장의 자율성을 통해, 은폐되고 위임자들의 이해관심과 일치되어 '정당한 자기 기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표자(생산자)와 위임자들(소비자) 간 이해관심의 신비한 일치, 즉 대리의 메커니즘은 각각의 이해관심을 생산하는 장들의 구조적 일치(상동성)에 기초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는 대리의 신비한 메커니즘이 하나의 장과 다른 장의 구조적 상동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구조적 상동성이란 "이 게임에서 왼쪽에 있는사람 a와 오른쪽에있는 사람b의 관계는 또 다른 게임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A와 오른쪽에 있는 사람B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a가 특수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b를 공격하려 할 때, A는 덩달아 그 덕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263). 이는 우리의 사례에서 대리자들의 정치장과 위임자들(민중)의 민중운동장(생활세계와 시민사회)이 상대적으로 자율적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장들 사이에는 모종의 이해관계 연동이 있음을 의미한다. 상징적 이해관심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이 곧 그들의 위임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대표자들의 이해관심을 "그가 대표하도록 되어 있는 위임자들의 관심으로 간주하는것을 허용한다"(264). 부르디외에 의하면, 이런 모델의 이점은 정치적 대표자들이 냉소적이지 않고 정치 게임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믿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264). 그리고 이러한 "강요된 만장일치의 기술" 때문에 우리는 "불화하는 발언을 생산"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260). 
     
    2) 정치적 소외(dispossession)를 낳는 정치(이데올로기생산)장과 정치자본의 동학
     
    (1) 부르디외는 정치인(공급)과 유권자(수요) 간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연결을 부정하고 정치(생산)장과 하비투스라는 매개를 도입했다. "정치적 (생산의) 장은 사실 보통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이다"(1982/2014: 197). 정치는 정치장에 관여하는 전문가들의 경쟁을 통해 생산되어 소비자로 격하된 시민들에게 제공된다. 이 과정에서 위임이 발생한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를 하기 위한 사회적 능력이 부족할수록, 그리고 정치적 행위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결여되어 있을수록," 위임을 할 수밖에 없다(198). 독과점이 심한 정치시장에서 문화적으로 박탈을 많이 받은 계층(유권자)일수록, 포괄적이고 전면적이며 '무한한 신임(fides implicita)'을 줌으로써 위임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들은 정당에 대한 제어능력조차 모두 빼앗김으로써 정치적 소외가 발생한다(199). 게다가 정치적 재화에 대한선택권도 모든 시민들이 동등하게 갖지 못한다(김태수, 2008: 115).
      반면에 정치인(대리인)은 정당에서 특수한 이윤을 보장받을 수 있고, 제도적으로 승인된 정치적 관심의 생산과 부과, 그리고 그 수단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관심을 위임자(유권자)들의 관심으로 바꾸어 놓을수 있다(201). 앞서 위임 메커니즘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치적 공간과 사회공간 전체 사이에 존재하는 상동성 때문에 정대표자(정치인)들의 특수한 이해관심은 사회공간에서 상동적 위치를 점유한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충족시켜줄 수 있다(213). "정치 장의 구조 안에서 그들의 위치가 사회 장의 구조 안에서 지지자들의 위치와일치할수록, 그들은 지지자들의 이익에 정확히 봉사한다"(214). 즉 완전히, 즉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이해관심들 간에 완전하고도 즉각적으로 보이는 가상적 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대의정치란 이 위임과정에서 "공적 권한에 대한 권력의 분포를 유지하거나 전복하기 위한 투쟁"이며, "객관화된 정치적 자원들, 즉 법, 군대, 경찰, 공공재원, 행정기구 등의 정당한 사용을 독점하려는 투쟁"이다(211). 또 여기에서 정당은 "지속적인 동원을 보증하기위해" "사회세계에 대한 표상을 구상하고 제시해야 하며," 직업정치인들의 자리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이다(211).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정치적재화의 생산과 공급은 정치 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정치적 견해(정치 이데올로기)나 당론, 정책과 같은 정치적 담론 재화는 정치장 내부의 경쟁적 관계가 장 외부의 요구를 번역•굴절함으로써 생산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체로 정치 장 외부사회의 요구(정치적 수요)가 장 내부의 정치인들의 목적과 이해관심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왜곡' 또는 '검열'되어 반영된다. 이에 따라, 정치 장에서 "표면되고 제기되는 문제 및 사안들은 장 내의 정치 행위자들의 내부 경쟁의 논리에 종속"되며, "정치적으로 표명 가능한 것, 혹은 불가한 것, 그리고 정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지음으로써 일종의 검열 효과를 낸다"(김태수, 2008: 119). 
      특히 정치적 재화가 담론의형식을 띨 때, 정치장은 단순히 정치적 재화를 공급하는 곳이 아니라(김태수, 2008: 117),"이 세계에 대한 지각범주들을 유지하거나 변형함으로써 세계를 유지하거나 변형하는"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다(295).
     
    (2) 이렇듯 부르디외의 정치장 이론은 정치적 재화의 독점구조를 통한 정치자본의 불평등 구조와 정치적 상징투쟁을 설명한다. 특히 생산자(정치인)와 소비자(유권자), 대리인과 위임인 간 정치자본의 불평등한 분배와 분배 투쟁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 정치자본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말은 특정 집단(주로 민중계급)이 자신의 이해관심이나 가치를(기존 정치장에서 인정되는) 정치적 언어로 표명할 수 있는 능력이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즉 경제적•문화적 소외 계층의 이익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표명되고 수용될 수 있는기회는 기득권층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김태수, 2008: 120).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가 "관심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방법은 능동적 기권" 또는 침묵뿐이고(201), 정치장(또는 정당)의 과두제 경향은 강화된다. 반의회주의나 탈정치적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정치가들의 독점에 대한 항의"이다(201).   
      정치자본은 기본적으로 상징자본의 한 형태이다(226). 그것은 사물의 주술적인 힘을 믿는 부적과 마찬가지로 집단적 신용의 표상이다. 이것은 뒤르켐의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연구한 부족의 문신과도 같은 객관화된 집단적 표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자본이기도 하다. "정치인이 의혹, 험담, 추문, 한마디로 신뢰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취약한 이유는 그의 특수한 자본이 순수한 신탁증권으로서 사물이나 제도 속에 얼마간 완전하게 객관화된 집단적 표상에 좌우되기 때문이다"(227). 이러한 정치자본은"신용을 축적하고 평판의 손상을 피하기 위한 부단한 노동을 대가로 해서만 유지된다"(227). 
      부르디외는 정치자본을 인격자본, 제도화된 정치자본, 인정과 충성이라는 상징자본, 직책 등으로 구분하고, 이 관계들이 어떻게 정치장과 정당, 그리고 그로 인해 정치적인 것을 만들어내는지 해명한다.
      일단 정치인이 정치장에서 갖는 특수한 권위는 동원력에서 나온다(229). 그리고 저명함이라는 인격자본은 이 동원력의 시초 축적을 회고적으로 정초하며 정당화한다(230). 하지만 정치적 권위라는 자본은 인격자본의 개별 인간 존재의 귀속을 넘어서 정당과 같은 기관에 의해 보유되고 통제된다(230). 정당에 의해 보존되는 정치자본은 (시초 축적에 필요한) 인격자본 뿐만 아니라, 정당인(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인정과 충성의 축적을 통해서 강화된다. 아울러 공천은 중세의 서임과 마찬가지로 정치자본의 이전을 나타내는 임명 행위이고(231), 직책은 마치 사제의 '직책이 갖는 카리스마'나 '은총'과도 같이(233) 자격없이도 자격을 만들어내는 정치자본이다. 
      무엇보다 현대 정치에서 정치자본은 상설기구들 속에 객관화되어 있다. "즉 정치적 '기계들' 속에, 자리와 동원의 도구들 속에 물질화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특수한 전략과 메커니즘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234). 그러므로 정치자본은 오랜 정치적 사업(노동)을 통해 정당과 관련 하부 기관들과 네트워크에 축적된 객관화된 산물이다(234).

    3) 부르디외의 민중론: 민중 담론(호명)에 대한 지식사회학
     
      부르디외의 민중론(1982/2018; 2005; 2013/2014)은 민중 자체에 대한 본질적•보편적•초역사적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논하는 사람들과 지식담론에 대한 성찰적 분석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고찰함으로써 본 3절에서는 민주화세대와 사회가 민중을 표상하거나 호명하는 방식을 역사적•담론적으로 연구할 방법론 또는 접근법을 제안할 것이다. 

    (1) 어떤 개념은 정치적 힘을 갖는다. 특히 그것이 사회적•정치적 투쟁에 결부된 사회적 집단에 대한 분류 범주라면 더욱그러할 것이다.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민중'이라는 단어는 정의하기 무척 까다로운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 같은 가변적 개념들은그 시대상을 따라 농민, 자영업자, 사무직까지 확장하거나, 아니면 노동자로 제한함으로써 정치적 힘을 얻는다(1982/2018: 111). 각자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환상에 의해서 조작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이 개념은 '신비화 효과'가 발생한다(111). 가령 사람들은 '민중'이라는 단어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111). 반면에 어떤 존재나 속성은 생각조차 되지 못하고 무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포함과 배제의 (투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중적'이라는 수식어는 분석이 필요한 모호한 개념이다. 이 수식어는 수식의 대상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누가 이 수식어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따라서 이 개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 정의의 무한회귀에 빠질 것이 아니라, 개념과 정의하고자 하는 존재의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체화된 정당성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부르디외는 구체적으로 "쌍을 이루는 형용사들의 체계를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114). "이 체계 속에서지배자들에게 귀속되는 속성들을 가리키는 용어"는 "언제나 긍정적 가치를 띠고 나타"날 것이다(114). 반면에 그렇지 않은 속성들은 부정적 가치를 띨 것이다. 

    (2) 부르디외는 '민중' 또는 '민중적'인 것을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서 탐구한다. 예컨대 민중언어에서의 은어는 심오한 의도가 있다기 보다는 지배문화와의 차별성과 저항을 추구하는 성향과 상황에 따른 전략이지만, 역설적인 지배 효과를 생산한다. 여기에 심오한 의도가 있다고 분석하는 것은 오히려 분석가들의 귀족주의적 태도이다(118). 이러한 부르디외의 주장에서시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중을 이해하는 데에는 지배와 복종의 양자택일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민중'에 대해 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자들 각자가 그의 관심과 환상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129). 왜냐하면 언어적•문화적 생산장이 부과하는 제약에 민중언어의 시장은 (선택적이고 굴절적으로) 반응하고 동시에 민중은 정치적언어•생산장에 정치적•문화적 정당성과 권력을 위임하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다시피, 담론 정치의 장이기도 한 이 생산장은 민중을 재현/대리하려는 대리인들의 이전투구의 장이다. 오늘날의 민중은다른 시대에 신이 그러했듯이, 사제들의 파벌싸움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261). 그리고 정치장은 사회집단들에 대한 권위적 명명과 상징 조작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김태수, 2008: 118).따라서 민중에 대해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민중을 둘러싸고 그들을 재현/대리하는 지배적 사회세력과그 '정의 내리기' 투쟁을 연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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