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르디외-수행성-버틀러
    Research & Lecture notes 2022. 3. 25. 08:45

    [강의/연구노트] 수행성 연구 

    1. 부르디외의의 언어사회학과 실천이론

    2. 부르디외와 버틀러 쟁점 재고

    2-1. 수행성으로서의 하비투스: 규칙 따르기(와 의미한정주의) 관점 

    (수행성과 하비투스: 개념적 접점의 탐색)

    2-2. 하비투스로서의 수행성: 수행성의 조건으로서 하비투스

    2-3. 퍼포먼스 이론의 여행(perform->performative->performativity->performance):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의 공연이론적 기원. 버틀러의 오독

    3. 수행성과 퍼포먼스: 현대사회학의 ‘수행적 전환’  

    기타: 에크리뛰르로서 버틀러의 육체 개념

     

     

    1. 부르디외의 언어사회학과 실천이론

     

    • 랑그1(내적 언어학;이론)에서 파롤(외적 언어학;실천)로.
    • 소쉬르 비판: 언어체계의 실행(execution)에서 실천감각으로.
    • 촘스키 비판: 언어능력(competence)에서 관계구조(장; 위치와 상징자본)로.
    • 동질적이고 평등한 언어공동체(언어적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불평등한 언어자본시장으로. 
    • 커뮤니케이션과 상징적 상호작용에서 상징적 권력 관계로.
    • 담론의 의미에서 담론의 가치와 권력으로
    • 문법적 규칙에서 언어능력(하비투스와 상징자본)과 언어시장으로

     

    • 버틀러에게 있어서 언어와 수행이 가능한 본질은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에 있지만, 부르디외에게서는 사회적 규칙이며,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한 일상언어학파나 민속방법론자들에게 있어서는 규칙 따르기(를 할 수 있는 능력)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리다와 버틀러의 반복가능성의 논리와 비트겐슈타인과 부르디외의 규칙 따르기(실천감각)를 비교/대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객관주의(순수 언어학, 구조주의, 법칙주의) 비판

      오스틴은 “말로써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발화가 어떻게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지”에 주목함으로써 언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제를 암시(Bourdieu and Wacquant 2015[1992]: 247). 하지만 오스틴 이후의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효력을 규정하는 적절성 조건이 사회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순수 언어학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언어적 관계는 항상 상징적 권력 관계이다”(성찰적사회학으로의초대). 수행문의 힘은 수행문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의 사회적 차원에서 온다. 말의 힘은 대변인에게 위임된 힘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말의 힘은 집단적 인정, 정당화된 제도로부터 기인하며, 위임받은 대변인들이 투쟁하는 장 내의 점유하는 위치와 권력(자본)에서 나온다(언어와 상징권력).

      부르디외는 실천에 내재하는 규칙, 모델, 규범 개념을 기각한다. 부르디외는 대표적으로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기저적 규칙의 법칙주의(the legalism of underlying rule)” 또는 “법적 형식주의(legal formalism; juridisme)”(Bourdieu 1995[1977])라고 비판했다. “준칙주의(juridisme)란 언어학자나 인류학자가 규칙을 기반으로 사회세계를 기술하고 어떤 명시적인 규칙에 대해 언명하는 작업을 마치 사회적 실천의 생성원리를 발견하고 실천을 충분히 고려한 것인 양 간주하는 경향을 가리킨다”(Bourdieu 1987: 94; 이상길 2013: 109에서 재인용). 한 마디로, “실천을 규칙에 복종한 산물로 보는” 것이다(1995[1977]:27). 이것의 문제점은 “(예컨대 통계적 상관관계와 같은) 영원한 규칙성을 실천들 안에 무차별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규칙, 규칙성에 대한 설명을 위해 과학에 의해 구성된 모델, 또는 행위자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상정되고 존중되는 규범이라는 관념은 행위에 대한 상호모순적인 이론들의 허구적 조화를 허용한다”는 것이다(Bourdieu 1990: 37-38). 

      부르디외(1990: 39-40)에 따르면, 규칙성을 망각하고 규칙으로 환원하는, 즉 현실(reality)의 모델로부터 모델의 현실로 비약하는 두 가지 흔한 방식이 있다. 첫째는 법칙주의이고, 둘째는 (행위자가 알지 못하는) 레비스트로스처럼 정신(mind) 또는 무의식을 최종적인 연산자이자 원인, 원리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 두 접근법의 공통된 문제점은 역사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순수한 묘사적 방식에서 관찰되는 규칙성과 일치하는 규칙으로부터, 행태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안정될 수 있다고 가정된 지배, 지시 또는 정향하는 규칙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래서 목적원인론(finalism)의 일종인 법칙주의의 가장 원초적 형태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법칙주의란 실천에 대한 자동발생적(spontaneous) 이론이며 실천이 마치 의식적으로 창안되고 허가되는 의식적 복종의 원리를 가진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지프(Ziff)에 따르면, ‘기차가 규칙적으로 2분 늦는다’고 말하는 것과 ‘기차가 규칙에 따라 2분 늦는다’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  후자의 경우가 제시하는 것은 말하자면 2분 늦은 기차가 어떤 정책이나 계획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 규칙은 규칙성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계획이나 정책과 연결된다 … 자연어에서 규칙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논증하는 것은 길이 지도상의 빨간선에 상응한다면, 길이 빨간색이어야만 한다고 논증하는 것과 같다(1960:38)”(Bourdieu 1990:40). 

      두 번째 방식은, 법칙주의에는 빠지지 않지만, 마치 행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성되어야만 하는 이론적 모델이라는 실천과정의 수단을 획득하는 것처럼, 행위의 원리가 행위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규칙들(의도를 나타내지 않은 의미, 의식적으로 상정된 목적 없는 최종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지배되는 실천이나 제도의 원리로서 설정됨으로써 무의식은 최종적인 기계적 연산자로서 정의된다. 여기에서 부르디외는 뒤르켐을 따라 이러한 무의식이라는 “상징적 사유의 발생을 설명”해야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은 “무의식의 개념을 통해서 자연의 신비에 역사의 목적을 새겨넣음”으로써 “역사적 행동을 망각”했고, 그럼으로써 “가장 자연적인 사회과학이자 동시에 자연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형이상학”이 된 것이다. 

     

     

    • 부르디외에게서 문법 규칙의 위상: “문법성의 자리에 가용성이라는 관념을, 달리 말해서 랑그의 자리에 정당한 언어라는 관념을 두어야 한다”(Bourdieu 1977: 646, 강조는 부르디외). 
    • 부르디외가 인용한 비트겐슈타인 철학자인 “자끄 부브레스(Jacques Bouveresse)에 따르면 문제는 무제한의 ‘문법적’ 문장을 생산하는 가능성이 아니라, 무제한의 상황에 실제로 적용되는 무제한의 문장을 생산하는 가능성이다”(Bourdieu 1990:32, 강조는 필자). 다시 말하자면 무제한의 문장을 생산하는 ‘가능성’은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그에 따른 (적절한) 적용에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부르디외가 단지 소쉬르나 오스틴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데리다나 버틀러와의 대질시켜볼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데리다나, 적어도 버틀러의 데리다는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에서 행위의 창조성을 찾는다. 버틀러는 지배규범의 제한적 전복 가능성을 새로운 맥락 안에서 의미화를 반복하는 탈맥락화, 재의미화에서 찾는다. 

     

    2. 부르디외와 버틀러 쟁점 재고 

     

    • 수행성 이론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
    • (1) 유의미한 행위란 무엇인가(행위의 의미는 누가 혹은 어떤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는가). 
    • (2) 주체와 주체성(subjectivity) 또는 행위자성(agnecy)이란 무엇인가? 주체성에서 구조의 지위와 기능. 행위의 배타적, 독점적 원인/소유자/최종성(finality)으로서 주체(의식적 의도를 갖는 정체성)의 부정. 주체와 비체 구분의 폐기. 
    • (3) 관례(ritual)와 실천(practice)이란 무엇인가
    • (4) 인과성: 담론적 실천(젠더)과 물질성(육체; 성) 생산의 관계 문제. 수행성은 그것의 근거(물질성; 생물학적 성을 구성함으로써)를 알리바이로서 생산(규범의 인용, 반복적 소환). 
    •  (5) 말이 수행적 힘을 갖기 위한 적실성 조건.

     

     

    수행문(발화수반행위)의 조건

    적절한 사람

    적절한 관행(practice) 또는 관례(ritual)

    적절한 상황 ➞ 적절한 이해 ➞ 매번 다른 무한한 상황을 특정할 수 없음(전체성 재구성 불가)

    ➞ 인용의 구조(반복가능성)

     

     

    버틀러와 부르디외: 관습(convention)이나 관례적인 것(ritual/ceremonial)) 또는 관행(practice)에 대한 입장차

    (버틀러는 관습, 의례, 관례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

    버틀러는 부르디외와 데리다의 견해를 “중재”하겠다고 밝힌다. 버틀러의 기획은 관행 또는 반복에 대한 구조적 설명을 제공하는 데리다와 사회적 권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부르디외를 중재하려는 시도다. “언어 행위 특유의 사회적 반복가능성 사회적 시간성을 고려하는 언어 행위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2016:15n). 

     

    수행성의 문제의식은 발언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순간적) 힘(수행문)이 발언을 초과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발언 그 자체의 순간에 한정되지 않는 작동 영역을 지니고 있다”(버틀러 2016:15). 버틀러에 따르면 발언의 순간은 의례화된다. 발언의 순간이 의례화된다는 것은 발언이 개별적인 순간이 아니라, 발언이 “압축된 역사성”을 지닌 의례 내에서 발언으로서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언을 발언의 순간으로부터 초과하게 만드는 것, 관습이나 관례의 본질은 무엇일까? 버틀러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관습의 의례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반면, 데리다는 의례의 본질을 “반복가능성”으로 본다. 이것은 “의미론적으로 좀 더 복잡한 사회적 의례의 뜻을 대신하여 반복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이다(2016:15n). 

    여기서 버틀러는 발언을 초과하는 의례를 압축된 역사성(시간성)으로 이해하고 이 역사성의 본질을  데리다를 따라 인용의 효과(반복가능성)로 규정한다. 발언의 “그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는, 말의 사건을 구성하고 이를 벗어나는 인용의 효과인 것이다”(2016:15). 즉 버틀러는 발언(순간)을 초과해서 효과를 갖도록 만드는 힘을 규정하는 조건을 관습이나 관례라기보다는 인용이라는 구조적 설명(반복가능성)으로 환원한다. 왜냐하면 수행문의 조건을 오스틴의 결론처럼 “전체적인 말의 상황”으로 규정할 때, 상황이라는 전체성을 모조리 규명하고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세성의 범위를 한정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없다”(2016:14). 

    주지하다시피 수행문의 조건, 특히 맥락이나 상황을 남김없이 문법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수행문을 규정하려던 오스틴의 언어철학적 실험은 (의도적인 것이든 아니든) 실패하고 역설적이게도 모든 화행(발언)이 맥락의존적이라는 사실만이 확인된다. 수행적 발화가 참인 조건 또는 문법적 기준(적실성)을 찾으려는 노력. 참된 발화와 허구적 발화를 정의하고자 했음. 사실(진위문)이나 발화자의 진정성에 근거하여 수행문의 성공과 실패를 규정지으려 했음. 그러나 수행문과 진위문을 구별지으려는 오스틴의 문법적 노력은 궁극적으로 실패. 수행문의 조건, 특히 관습(적 행위)을 반증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님. 다시 말해 모든 화행이 관습적이자 발화수반행위을 넘어 발화효과행위일 수밖에 없음(양자 역시 구별안됨)을 역설적으로 드러냄. 심지어 허구적 발화조차 발화수반행위(존 설)이고 수행문임(피시의 오스틴 비판). 다만 설은 진짜 의도(intending)와 가짜 의도(pretending)를 구분하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피시의 설 비판). 따라서 모든 화행(수행문)이 발화효과행위이며, 이것이 바로 화자(주체)의 의도를 넘어서는 수행성의 핵심. (이러한 입장은 스탠리 카빌 1964 입장과 유사)

     

    그러나 문제는 수행문의 조건을 규정짓고 그 의미를 제한하는 맥락이나 상황이 무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언어의 효과는 문법으로 규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맥락이나 상황 역시 규정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발언의 과거와 미래는 어떠한 확실성으로도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2016:16). 

    다시 정리하자. 언어(수행문)는 항상 문법규칙을 넘어 상황이나 맥락을 초과하지만, 곧 상황이나 맥락을 특정해야하는 문제 앞에 도달한다. 달리 말해 언어의 조건은 상황이나 맥락이지만, 상황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 행위의 효과를 어떻게 최선으로 판단하는가를 알기 위해, 문제의 언어 행위에 대한 적절한 맥락을 찾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2016:16).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의례조차 적절한 맥락으로서 화행을 규정할 수 없다. 의례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경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적절한 맥락이나 상황을 규정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도피한다.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녀는 데리다를 따라 인용의 효과라는 구조적 설명으로 맥락을 대체한다(물론 그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데리다의 구조적 설명을 넘어 육체에 대한 사회적 설명으로 나아간다). 또 이 대목에서 그녀는 “맥락의 상실”에 관해 말한다. 언어의 어떤 효과는, 가령 상처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은 맥락의 상실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의례”“임명”, “위임”이다. 

     

     

    행위자(agency)로서 언어

    버틀러는 언어에 행위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행위능력(agency)을 그것의 기원으로 간주된 주체로부터 떼어내 언어에 부여한다. 버틀러는 언어를 “‘대체로 행위능력 -  즉 결과를 갖는 어떤 행위’으로, 즉 어떤 확장된 행하기, 결과를 갖는 수행으로 사유”하는 정의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행위능력이라는 사유 공식(형태적 치환)은 언어 안에서 제공된다. 즉 이 공식이 언어의 행위능력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무언가를 행하고, 언어를 통해 효과들을 생산하며, 언어에 대해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우리가 행하는 바로 그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행함에 대한 이름이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우리가 특징적으로 수행하는 행동에 대한 이름)이며 우리가 야기하는 것, 즉 행위와 행위의 결과들이다”(버틀러 2016:24-25). 

     

     

    • 유의미한 행위로서 수행성

      수행문은 ‘유의미한 언어’를 정의하고 조건지으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의미있는, 그래서 효력을 갖는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의미(meaningful; significant)’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의미는 효력으로 대치된다. 논리실증주의 언어/분석철학자들은 의미를 진위 여부와 동일시했다. 의미있는 진술 또는 문장은 참이거나 거짓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는 정확한 문법과 개념 규정(분석명제)이 주체(화자) 밖에서 관찰되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상태, 즉 진위로 환원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논리실증주의에서 의미있는 언어는 대상의 상태를 정확히 묘사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이것은 대상(어떤 행위)과 언어의 대응 규칙(법칙)을 발견하거나 규정하려는 작업인 것이다. 이렇게 실증주의적 견지에서 의미는 대상의 상태에 대응하는 객관적인 묘사의 정확성의 한계 내에 국한된다. 의미를 주관적 동기에 국한시킬 수도 있다. 이 때 유의미한 언어는 관념적 정신상태에 대응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어떤 행위의 의미란 발화자 개인의 주관적인 동기와 관련되지만 그것을 초과할 수도, 심지어 그것과 무관하게 제시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의미를 기능과 효과(인과성)로 보는 관점과 공명한다. 

      결과적으로 수행문이란 의미가 정신상태에 대한 정확히 ‘대응’하는 묘사 - 가령 주관적 진정성 - 나 진위 여부를 따지는 문장이 아니라, 어떤 문장의 의미가 성패(doing/undoing) 여부에 따르는 것이다. 이 성패 여부는 철저히 맥락의존적이다. 다시 말해 수행문은 참/거짓이 아니라, ‘적절’(felicitous)하거나 ‘적절하지 않다(infelicitous)’로만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오로지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어야만 언어의 유의미성을 인정했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달리, 오스틴을 비롯한 일상언어학파는 진위와 상관없이 적절성 여부만으로도로 의미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여기에서 흔히 간과되지만 사실상 핵심적인 문제인 성패 여부는 어떤 대화나 문장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행위자들의 특정한 ‘관심’과 그에 따른 참여자들의 집합적인 실천(의미해석과 정당화라는 필요조건2을 포함하는) - 예컨대 수행문을 성공이나 실패로 ‘보이게 만드는’ 실천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의 적절성은 발화자들의 이해관심과 실천적 과정에 종속된다. 

     

    수행성에서 법(규범)과 수행의 관계

    규칙 따르기와 의미한정주의로서 수행성과 하비투스

    • 이런 관점에서 앞선 화행의 인용과 반복은 행위자들의 전략적 실천을 의미한다. 행위자들은 이전의 집합적 행동들과 항상 ‘같지만 다르게’ 행동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사람들은 행위의 의미를 동일한 맥락이나 범주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의 행위로 ‘반복’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은 인용과 반복을 통해 행위의 실천적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전략적 실천의 구조적/추상적 원리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은 행위자들이 규칙을 무한대로 적용하며 심지어 언제나 예외적인 상황을 창출하여 그 규칙을 ‘개인적’으로 준수한다고 주장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의미한정주의). 즉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은 규칙의 예외상태조차 규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전략적 실천능력에 대한 추상화로 해석할 수 있다.
    • 다시 말해 탈맥락적 인용은 어떤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나 진술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하는 행위나 진술의 맥락을 기존의 맥락과 차별화하는 실천전략에 다름 아니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버틀러: 만일 수행성 내부에 메시아적인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종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이처럼 기대의 형식을 상정하는 사유 방식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제가 앞서 표현한 대로 존재할 권리의 일부로서 생각한다며, 수행성은 끝없이 개방되어 있는 현실을 존재하게 하는 접합의 한 실천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없이 개방되어 있음”은 아마도 목적론 (그리고 종말론) 바깥의 자유의 실천을 나타내는 이와 같은 불확정성을 표현하는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버틀러 2016:209)

     

    다르게 반복하기, 즉 인용에 의한 규범의 패러디(적 재전유)도 집단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패러디는 무한하게 가능하나 패러디의 성공, 즉 효과적 저항 여부는 인용의 적절성의 한계 내에 있다. 이 인용의 적절성은 집단적 설득 과정과 사람들의 판단에 - 그것이 감정적 공감이든 이해이든 간에 - 달려 있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 - 데리다적 의미에서 구조적으로 - 인용의 범주는 무제한적이지만, 집단적 효과의 국면에서 인용 역시 그 적절성에 대한 논쟁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이런 점에서 버틀러와 부르디외는 인용에 의한 저항 전략의 연속된 두 가지 기제의 각각 한 쪽 편을 해명하는 것으로 중재될 여지가 있다. 즉 버틀러는 불안정한 규범의 무제한적인 패러디 전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부르디외는 저항 전략에서 상상하고 인용할 수 있는 패러디적 규범에 가중치를 부여하거나 삭제하는 사회적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버틀러는 저항이 성공했을 경우에만 그 원인을 패러디로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실패는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부르디외는 성공과 실패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버틀러는 반복가능성으로부터 구조의 불안정성 - 행위의 창조성 - 을 주장하는데, 문제는 규칙을 사사롭게 준수하는 행위가 실제로 집단 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허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가령 한 학생이 칠판에, 교사가 쓴 수열 1-2-3-4-5에 이어, 6-7-8-9-10이라는 소위 정답(수업에서 정당한 ‘올바른’ 규칙)에 ‘반항’하여 5-4-3-2-1 또는 10-20-30-40-50이라고 쓰거나 11-12-13-14-15로 쓰고는 자기만의 의미있는 규칙(정신상태나 진정성)을 만들고 따랐으며 이것은 기존의 규칙에 저항하는 새로운 규칙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수열 규칙의 생성 ‘가능성’은 기존 수열 ‘규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도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새로운(사사로운) 수열 규칙은 기존(집단적인) 수열 규칙의 인용이며 반복인가? 반복가능성은 구조적 원리라기보다는 사실상 그러한 무제한적 인용을 매번 해낼 수 있는 행위자들의 현실적 행위능력에 대한 묘사일 따름이다.  따라서 인용과 반복의 가능성이란 탈맥락화의 구조적 원리가 아니라, 의미와 실천이 언제든지 기대를 벗어날 수 있다는, 규칙을 따를 수도, 위반할 수도 있는 일상적 행위능력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탈맥락화는 일상적 실천과 분리되어 논의될 수 없다.  

    하지만 버틀러는 행위능력에 대한 묘사를 (사회적 반복가능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구조적 원리로 대체하여 특권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준칙주의) 학생은 새로운 수열 규칙을 무한한 상황에 적용할 ‘가능성’ 또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규칙에 저항하는 행동은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사회는 행위주체의 의도를 넘어, 이 새로운 규칙의 적절성과 정당성을 판단한다. 그 결과, 학생이 제시한 어떤 수열 규칙은 기존 수열 규칙에 대한 도전이나 새로운 적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어떤 규칙은 무시된다. 

    • 폴 윌리스의 <Learning to Labour>를 보자. 이 ‘싸나이들(lads)’을 수행성 이론에 입각해 본다면, ‘간파’와 ‘저항’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 버틀러가 “수행성 내부의 메시아성”이라고 말하는 법은 기대의 한 형식이다. “법은 법에 대한 기대의 장면 속에서 그것이 언급될 때마다 언제나 생산되고 정교해집니다. 동시에, 심지어 법이 되풀이되서 생산될지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히 혹은 확정적인 방식으로 물질화하지 않습니다”(버틀러 2016:209).  

     

    규칙은 상황에 따라 따르기도, 따를 수 없기도 하다는 점, 동시에 상황은 규칙에 따라 을 비트겐슈타인이 예시한 수열을 응용하여 생각해 보자. 

    수학 수업(대칭수 수업) 수열

    0-1-2-3-4-5-6-7-8-9

    11-22-33-44-55-66-77-88-99

     

     

    • 주체 없는 수행성

      우리는 화자(행위주체)의 지향/의도(“정신상태의 보고”(스탠리 카빌 1964))를 넘어서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화행 또는 수행문의 의미를 확정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계속 실패했다. 

      여기에서 수행문, 나아가 행위의 의미와 연관된 수행성의 핵심적 문제의식이 나온다. 그것은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는 버틀러의 언명으로 요약되는 행위주체의 위상과 정체성 문제다. 행위의 의미는 행위주체에게 없다. 수행문의 효과는 행위주체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더욱이 행위에서 당연히 상정된 행위의 주인으로서 동일성(identity)의 주체는 없다. 주체는 육체와 사회의 교차관계에서, 혹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효과일 뿐이다. 행위자는 단지 행위에 (어떤 과정과 효과에서) 부여된 구성물일 뿐이다. 수행성은 행위의 의미를 행위주체의 내밀한 주관적, 관념적, 정신상태로 축소시키지 않으면서도 행위능력을 (그 효과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전통적인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행위자는 행위의 원인으로 인정되어왔다. 하지만 수행성의 관점에서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단일한 행위자가 행위(의 의미)를 결정할 수 없다면 행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전적 행위이론의 인과론을 부정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결론은 행동이 종결된 후, 또는 적어도 행위의 진행과정 안에서만 어떤 행동을 유의미한 행위로서 제시하거나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주체도 행동하기 전에 (마치 내밀한 정신적 동기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놓여진 또는 전개되는 복합적인 시공간의 관계 내에서 비로소 잠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3 이제 여기서 우리는 수행성 개념이 궁극적으로 퍼포먼스 개념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수행성은 사실상 퍼포먼스로 정의되는 어떤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 스타일로서 구현되는 젠더(의미)는 단지 그 육체의 주인으로 간주되는 주체의 완전한 의도로 결정될 수 없다. 육체 스타일은 그 자체로 공적(정치적) 공간에서 ‘행위’하기 때문에 행위자들의 의도를 배반할 수 있다. “발언은 정확히 진술되지 않거나 전혀 진술될 수 없는 의미를 수행한다 … 몸은 알 수 없는 기호가 된다. 몸의 행동들은 절대로 완전히 의식적으로 정향되거나 자유의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의식되지 않는 몸은 언어 행위 내에서의 의도성(intentionality)의 한계를 표시한다. 언어 행위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거나, 다르게 말한다”(버틀러 2016:29). 이렇게 “완전히 의도적인 화행이라는 개념은 의도성을 전복시키는 말하는 몸에 의해 영구적으로 전복된다”(버틀러 1997[2016]:10). “말하면서 몸이 수행하고 있는 그 행위는 절대로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몸은 말의 맹점이다. 몸은 말해진 것을 초과해서 행위한다. 그러나 몸은 또한 말해진 것 내에서, 말해진 것을 통하여 행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행위가 육체적 행위라는 것은 그 행위가 말의 순간에 두 개로 분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말해진 내용이 있으며, 그러고 난 뒤에 말의 육체적인 ‘도구’가 수행하는 말함으로 나뉜다”(버틀러 2016:30). 

     의미나 젠더(육체) 형성에 있어서 화자와 청자, 배우와 관객, 구성하는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주체와 비체(구성적 외부)의 구분을 해체. 

     

    • 데리다는 수행적 발화를 (발화자와 수신자의) 현전(맥락)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면 안된다(즉 의미가 축소된다)고 하는 것.

    데리다는 결국 관습과 맥락의 본질이 인용의 구조라는 것. 기호(의미)는 반복되지 않으면 식별될 수 없음. 맥락이란 언제나 탈맥락일 수밖에 없다. 

      화행의 가능성 조건을 탐구하는 데리다는 수행문 실패의 일반성은 설명하나 성공의 일반성은 설명하지 못함. 이는 탈맥락화는 어떻게 권력이 작동하는가와 같은 문제임. 이 문제점은 버틀러에게 그대로 나타남. 

     

    •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은 정체성이라는 허위의 헤게모니적 개념을 폭로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며, 정체성 정치와 문화적 인정을 둘러싼 논쟁에 그 핵심이 있다(Boucher 2006:112). “헤게모니적 규범에 대한 저항의 잠재성”(Boucher 2006:112).

     

     

    • 수행적 행위: 수행성의 적절성 조건의 내부/외부 이분법을 넘어서

     

    0. 말의 효력, 즉 수행성의 적절성 기준이나 조건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 

    김주환은 말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복가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적 주술 의례를 구성하는 여러 특수한 적절성의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018:386). 그렇다면 적절성의 조건들을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 본고는 김주환의 논의에서 더 나아가 적절성의 조건들은 그 조건들이 의문시되는 지엽적인 상황 안에서 문제시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대개) 적절성이 조건들이 의문시되지 않는(승인, 오인) 한에서는 논쟁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절성 정의 자체가 투쟁의 내기물이다. 적절성의 조건은 적절성을 규정하기 위한 해석투쟁에 연루되어 있다. 적절성은 규칙이며 적절성의 기준이나 조건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판단 역시도 ‘규칙 따르기’, 즉 실천감각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주환도 적절성의 기준들을 “실천규칙들의 존재”라고 보았다(김주환 2018:360). 따라서 말이 효력(수행성; 수행적 효과)을 갖기 이전에 적절성의 기준이나 조건을 완벽하게 한정짓거나 설계할 수 없다.4 다시 말해 이 적절성 해석투쟁에 하비투스가 연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하비투스의 결정력은 명시화된 규범의 재현(꼭두각시!) 형태로 작용하지 않고 언제나 적절성 조건은 “하비투스의 형태로 주어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전제들’(올리브지 2007: 5장)”(이상길 2013:136)에 다름 아니다. 

     

    0-1. 선행연구: 김주환(2018)은 부르디외와 버틀러를 대질/대립시키며 부르디외를 지지하는 관점에서 버틀러를 비판한다.

    1. 수행적 행위의 적절성의 조건, 규범이나 규칙들의 목록은 상황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2. 수행적 행위는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 부르디외와 버틀러는 ‘의도’를 넘어서는가? -> 발화자(행위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수행적 의미가 배태되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집단의 축적된 상징자본인가 아니면 신체인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가? 

    3. 수행적 행위가 상황 또는 맥락으로도, 의도로도 규정될 수 없다면 무엇으로 그 적절성(조건)은 규정되는가? (의례?) 행위의 의미를 규정해오던 기존의 규범 또는 맥락을 벗어나는 행위(수행성)는 어떻게 가능한가? 달리 말해 말의 효력 즉 수행적 행위나 수행문은 어떻게 탈맥락화되는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론은 무엇인가?

    4. 오스틴: 언어내적 힘 ->기각

    5. 부르디외: 언어(담론)의 힘 = 사회적(임명) 의례(에 대한 집단적 공모에 따른 승인) = 장(언어시장) = 대리자의 사회적 위치 = 대리자에게 위임된 상징자본 = “집단에 축적된 상징자본” = 승인된 권력.

    권위있는 언어의 적실성 조건: 제도: (1)언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조응 또는 누빔점) (2)적절한 수용자 (3)(위임계약을 드러내는) 적절한 상징적/의례적 형식 또는 스타일 (부르디외 141-142) “통일된 전례의 규약”, “상징적 부속물”(부르디외 143-144) = 정당하고 그럴법한(make sense) 서사(형식) = a followability(X) = followabilities = fusion = 대안적 의례 서사의 가능성 = 대안적 문화코드(각본)나 화행을 정당화하는 레퍼런스를 도입/제시/주장할 수 있는 능력 = 규칙 따르기 = 가톨릭 종교장(내의 역학관계구조)의 변동에 따른 “전례의 다양화”(144) = “위임계약의 재정의”(144) -> 더 나아가 복수의 장에 조응하는 복수의 성향들의 체계(하비투스)

    “가장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조건은 깨닫지 못함이나 믿음에 의해 인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부르디외 141-142). -> 독사 = 현상학

    부르디외는 “말의 힘의 사회적 원천”을, 반면 버틀러는 “육체와 결합된 말, 즉 육체의 말하기가 지닌 본래적 저항성”을 강조한다(김주환 2018:359).

    김주환에 따르면 부르디외와 버틀러를 비롯해 오스틴, 데리다 모두 수행문을 사회적 의례로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2018:359). “사회적 주술 의례”

    5-1. 의례의 핵심: 집단적 공모에 따른 오인(일루시오) = 상징폭력(-장) = the social

    6. 버틀러: 언어를 개방체계로 간주하는 전제, 기존 맥락 또는 일상용법과의 단절(2016:271); 몸의 저항적 인용(반복가능성). 수행문의 힘은 탈맥락화 및 재맥락화에 있다.

    “우리는 언어를 고정적이며 폐쇄된 체계가 아닌 것” “‘사회적 지위’에 의해 미리 기능적으로 보장되는 체계”가 아닌 것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발언의 권력과 의미는 과거의 맥락이나 ‘지위’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언은 자신이 수행하는 맥락과의 단절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획득한다. 과거의 맥락, 혹은 일상적인 용법과의 그 같은 단절은 수행문의 정치적 작동에서 핵심적이다”(버틀러 2016:271). 버틀러는 로자 파크스의 사례를 통해 “과거의 정당성 없는 적용이 미래의 형태라는 가능성을 부수어 열면서” “현존하고 있는 형태의 적법성에 도전하는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버틀러 2016:274-275).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앞좌석에 앉았을 때, 그녀는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과거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남부의 인종분리적인 관습 때문에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과거의 권위를 갖지 못했던 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그녀는 그 행위에 어떤 권위를 부여했으며, 기존의 확립된 적법성 규범을 전복시키는 반란적인 과정을 시작했다”(버틀러 2016:275). 

    6-1. 의례의 핵심: 인용(반복가능성) = 텍스트의 구조적 특성 또는 “기호들의 내적구조”(데리다)(김주환 2018:363)과 기호로서 몸의 불가해성(버틀러?)

    5+6: 부르디외와 버틀러의 중재

    7. 알렉산더: 연극의 요소들의 (탈)융합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는 “말하기의 순간에 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15). 문제는 발화가 행위가 되도록 하는 적절한 조건(상황이나 권위)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가 될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어떤 발화를 행위로서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그러한 발화들이 관례적이거나 의례적인 반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발언은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관례의 형태를 부여받는 한에서만” 작동한다. “따라서 발언 그 자체의 순간에 한정되지 않는 작동 영역을 지니고 있다”(15).    

     

    버틀러는 발화수반행위의 발화 ‘순간’은 “의례 내에서” “압축된 역사성을 지니”며, 이것은 “인용의 효과”라고 주장한다. 

     

    발언내행위적 언어 행위는 발언의 순간에 행동을 수행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의례화되는 만큼, 절대로 그저 개별적인 순간이 아니다. 의례 내에서의 그 ‘순간’은 압축된 역사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그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는, 말의 사건을 구성하고 이를 벗어나는 인용의 효과인 것이다(15).

     

    다시 말해 버틀러는 의례 내에서 ‘순간’으로 포착되는 ‘압축된 역사성’을 ‘인용의 효과’라고 치환하는 것이다. 발화수반행위가 성립되기 위한 적절한 조건으로서 의례,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의례가 담지하고 있는 ‘압축된 역사성’은 하비투스에 다름 아니다. 부르디외는 “언어행위를 뒷받침하는 관습의 의례적 차원을 강조”(버틀러)과 더 나아가 의례에 대한 집단적 인정을 장조한 반면, 데리다는 의례를 ‘반복가능성’이라는 용어로 대체”했다(15n). 

     

    버틀러가 주장했다시피, 오스틴은 언어 행위의 적절성 조건을 상황 전체의 규명으로 보았다. 즉 우리가 맥락과 상황 전체를 이해(intelligibility)해야만 언어 행위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버틀러가 적확하게 지적했다시피, 언어 행위의 ‘전체적인 상황’ 규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적절성 조건을 예외없는 규칙들의 목록으로 확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발언내행위의 힘을 인식하는 것은 언어 행위의 ‘전체적인 상황’이 규명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오스틴의 주장은 근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15). 따라서 적절성 조건은 언어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예외없는 규칙들의 목록으로서 상황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비투스는 바로 이러한 예외없는 규칙들의 목록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 적절성의 조건들을 설명하며, 우리가 상황 전체를 이해하지 않고도 어떻게 ‘적절하게’ 행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하비투스는 언어 행위가 행위자의 의식적인 의도(intention)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 속의 몸이 의도성을 전복시킨다”(29). 버틀러 역시 “의식되지 않는 몸은 언어 행위 내에서의 의도성intentionality의 한계를 표시한다. 언어 행위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거나, 다르게 말한다”고 주장한다(29). 여기서 버틀러는 말해진 것을 초과하는 몸을 특권화하는 근거로서 (의식적인) ‘의도성’의 한계를 제시한다. 버틀러가 말하는 의도성이란 의식적인 것이다. 버틀러는 펠만의 오스틴 독해를 소개하면서 수행문이 “어떠한 의식적인 의도로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행”(30n)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몸이 언어를 초월한다는 버틀러의 주장은 몸의 행위가 의식적인 의도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렇다면 의식적인 의도로 설명되지 않는 소위 무의식의 영역이 자리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 영역에 대한 설명이 부르디외 사회학과 버틀러 간의 차이 또는 논쟁지점에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또한 한편으로 현상학적 의미의 지향성intentionality은 버틀러가 말하는 의식적인 ‘의도성intentionality’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버틀러는 이 미지의 영역을 육체(육체적 효과)에 할당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펠만의 기여는 “발언이 육체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265). 버틀러의 펠만 인용에서 우리는 버틀러의 기반암(bedrock) 또는 최종언어(final vocabulary)가 몸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발언을 지배하는 규범은 어떻게 몸에 거주하게 되는가?”(버틀러 266). 

    “몸은 말해진 것을 초과해서 행위”하기에 “말하면서 몸이 수행하고 있는 그 행위는 절대로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30). “그러나 몸은 또한 말해진 것 내에서, 말해진 것을 통하여 행위하는 것이기도 하다”(30).  

     

    부르디외는 이와 같은 버틀러의 주장을 헥시스 개념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헥시스는 신체와 언어의 이분법을 넘어, 언어 행위의 적절성 조건으로서 하비투스가 어떻게 신체적인 것인지를 설명한다. 버틀러가 펠만을 따라 주장하는 “말하는 몸”도 신체와 언어의 형이상학적 이분법 또는 대립을 파괴하고 붕괴시킨다(29-30). 

     

    (252)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규칙(개념)과 그 적용(실천)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는 새롭게 등장하는 사례들에 대한 적용을 규칙이 완전히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968:§201)을 재해석하자면, 어떠한 행동도 규범적 규칙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실천은 포괄적 상징에 의해 인과적 원인으로 확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든 행동을 어떤 규칙 또는 상징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예화에서 보듯이, 더하기의 규칙을 익혔다고 해서 이후에 새롭게 등장하는 무한한 사례들에 대한 ‘올바른’ 적용이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과거에 학습해 온 규칙의 ‘올바른’ 적용 사례들은 유한한 반면, 앞으로 적용해야할 사례들은 무한하기 때문이다”(김현준 미간행).

     

    ‘규칙을 준수하는 것(obeying a rule)’은 실천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규칙을 준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규칙을 ‘사적으로’ 준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준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규칙을 준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Wittgenstein 1968:§202 강조는 필자). 

     

    “즉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거나 ‘해석’하는 것과 규칙을 따를 수 있는 능력으로 행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규칙을 따르는 행위에 대해 사유하거나 해석한다고 해서 그 해석이 행위로부터 독립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규칙에 일치하는 것으로 성찰적으로 설명하고 보고할 수 있지만, - 그래서 우리는 행위자의 그 성찰적 해명을 ‘규범’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 그 실천적 과정의 절차에서 빠져나온 규칙 자체(규범)가 독립적이고도 인과적으로 실천과 일치하게끔 만들어준 것은 아니다”(김현준 미간행)

     

    버틀러는 어떤 발언이 반란적 행위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재반복(reiteration)’ 즉 반복 속에서의 ‘재기입(reinscription)’ 가능성을 말하는 데리다를 따라, 맥락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육체적 언어의 힘에서 찾는다. 육체적인 발언이 기존의 맥락(=적절성 조건)과 단절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반면에 버틀러에 따르면, 부르디외에게서 육체적인 것은 기존의 규범들에 저항하며 교란시키지 못한다(266). “발언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 생산하는 관습에서의 위기를, 즉 검열된 발언이 ‘공식적 담론’에 출현하여 그 수행문을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개방할 때 그것이 갖는 반란적인 ‘힘’을 고찰하지 못한다”(266-67). 버틀러에 의하면 사회를 변혁하는 수행문의 힘은 기존 맥락과 단절하고 새로운 맥락을 떠맡는 능력인 ‘탈맥락화’(275)에 있지만, 부르디외는 이 탈맥락화에 의한 사회 변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를 고정적이며 폐쇄된 체계가 아닌 것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즉 그 발언이 모방적으로 관련되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 미리 기능적으로 보장되는 체계 말이다. 발언의 권력과 의미는 과거의 맥락이나 ‘지위’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언은 자신이 수행하는 맥락과의 단절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획득한다(버틀러 271).

     

    버틀러는 “기존의 정당성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들”을 해명하는 이론을 제공하고자 한다(273). 

     

    버틀러는 데리다의 ‘반복가능성’이 “의미론적으로 좀 더 복잡한 사회적 의례의 뜻을 대신하여 반복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을 확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관행의 의례적인 차원’과 ‘반복에 대한 구조적인 차원’을 중재하고자 한다(15n). 사실상 이러한 기획은 데리다의 ‘반복가능성’ 개념과 (버틀러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인용’을 발화행위의 적절성 조건으로서 관행이나 의례를 설명하기 위한 특권적 개념으로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 의례의 복잡한 과정을 새삼 강조하는 버틀러에게 우리는 사회적 의례가 단순히 반복에 대한 구조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반복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은 사회적 의례 개념에서 항상 강조해왔던 것이었다. 사회학은 구조를 항상 ‘패턴’으로 인식해왔다. 반복된 행위들이 제도를 이룬다. 그리고 제도는 개별 행위들의 맥락과 준거가 된다. 

     

     

     

    • •Reworking, Attuing, Fine-tuning, Reformulate Bourdieu: 상징폭력 개념을 구조결정론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이 글에서는 장과 하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를 이념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장과 하비투스 간의 “존재론적 공모”는 “이념형적 공모”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가 중범위이론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존재론적 공모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개별 존재자들 간의 공모, 즉 개별 장들과 개별 하비투스들이 ‘여백 없이’(버틀러 290 참조)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화된 존재들 간의, 즉 역사적 개별 영역들을 일반화한 장과 성향체계의 일반화된 실천 원리로서 하비투스 간의 상호의존(공모)을 이론화한 것.

    “변증법적 관계”, “통시적 상호의존”(Fogle and Theiner 2017:9)

    “객관화와 체화의 변증법”(Bourdieu 1977:87). “위치들과 성향들의 변증법”(Bourdieu 2000:155).

    “외재성의 내면화와 내재성의 외재화의 변증법”(Bourdieu 1977:72)

    존재론적 공모란 장과 하비투스의, 기계적 인관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순환적이며 역사적이며 심층적인 착종 또는 접합을 의미한다. 장의 구조적 관계들 또는 객관적 위치들에 “이미 조절된(pre-adjusted)” 하비투스의 지속적인 재구조화가 사회구조(장)를 지속적으로 재구조화한다는 뜻이다.   

    “사회세계의 관계는 ‘환경’과 의식 간에 종종 가정된 기계적 인과성이 아니라, 보다 존재론적 공모 같은 것이다. 동일한 역사가 하비투스와 주거지 모두에, 성향과 위치 모두에, 왕과 그의 법정에, 참여자와 그 형식에, 주교와 그의 관구에 거주할 때,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소통가능한 역사는 역사 자체가 가진 이미지에 반영된다”(Bourdieu 1981:306). -> 뒤르켐 분류체계 사회신정론(김주환)

     

    하비투스로 육체화되어 있는 구조는 실천을 통해서 객관화된다. 이러한 객관화, 즉 존재론적 공모의 기제가 구조를 ‘재생산’ 또는 구조에 ‘순응’하게 하고, 구조에 저항하는 것은 객관화되지 않고 연속적인 불안정성(반복가능성)에만 노출된다는 오해와 달리, ‘저항’적 실천 역시 객관화된다. 행위자들은 이른바 ‘저항’이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저항인지 순응인지, 또 그 정도를 객관화하여 판단할 수 있다. 

     

    대다수의 비판자들이 장과 하비투스의 조응관계에서 시간 변수를 간과. 하비투스, 특히 헥시스 개념은 데리다의 반복가능성이나 이를 발전시킨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만큼이나(혹은 그 이상으로) 강제/저항, 또는 사회학적 설명/정치적 희망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수행성(수행적 과정)을 잘 보여줌.

     

    • 버틀러의 부르디외 비판

      부르디외의 이론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비판은 구조결정론이라는 것이다(Atkins 2004; Susen 2013; Thompson 1984; Willis 1981 참조). 버틀러 역시 이 비판에 궁극적으로 동의한다. 버틀러는 언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하는 부르디외가 “교조화된 정통 맑스스주의의 경제결정론, 즉 토대/상부구조론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김주환 2018: 366). 특히 말의 힘이 위임받은 대변인의 장 내 위치에서 나온다는 부르디외의 주장에서 이 ‘위치’를 맑스주의의 계급으로 환원한다(김주환 2018: 367).

      부르디외 이론이 구조결정론이 될 수밖에 없는 보다 심층적인 이유는 장과 하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 때문이다. 하비투스는 장의 “객관적 명령”에 따라 “형성되고 제한”된다는 것이다(Butler 1999:114). 재거(2012:216) 역시 다른 비판자들과 마찬가지로 장과 하비투스의 궁극적인 공모 때문에 사회구조와 일치하는 변화만이 있고, 저항(또는 상호성)과 급진적 변화의 자리는 없다고 비판한다. 이하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존재론적 공모는 통시적이고 변증법적인 순환성 안에 시차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지, 시간 변수를 삭제한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조결정론을 극복하는 버틀러의 해법은 무엇일까? 버틀러의 핵심 질문은 규범이 어떻게 체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발언을 지배하는 규범은 어떻게 몸에 거주하게 되는가?”(2016:266) 이는 이른바 규범의 ‘내면화’라고 하는 사회화의 기제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규범의 내면화 내지 체화가 과연 의식적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가 하는 여부다. 버틀러는 “부르디외가 규범의 비의도적이며 비고의적인 편입이 발생하는 방식에 대한 가능성 있는 설명을 어떻게 제공하는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2016:266).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 부르디외는 “발화 속에서 육체적인 것이 어떻게 자신을 규제한 규범들에 저항하며 규범들을 교란”하는지는 보여주지 못했다(2016:266). 즉 버틀러는 하비투스 개념이 규범을 비의도적 방식으로 체화되는 것을 설명하지만 신체를 규제하는 규범에 저항하고 교란하는 신체적인 발화에 대한 설명에는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부르디외는 신체적 발화의 암묵적(tacit) 수행성, 즉 하비투스의 수행성을 등한시하는 정치적 담론의 수행성만을 설명한다. 또한 발화가 수행하는 맥락과의 데리다적인 단절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부르디외의 견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관습의 위기와, 공식적 담론처럼 보이는 검열된 발언의 반란적 힘, 그리고 수행적인 것이 예측불가능한 미래로 개방됨을 보지 못한다(Butler 1997:142). 따라서 부르디외는 담론적 행위자성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Jagger 2012:217).  

     

      김주환(2018: 365)에 따르면, 버틀러의 부르디외 비판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그녀는 부르디외를 차이의 반복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에 대한 사회이론가로 위치시키면서(Schmeidel 2017: 235), 수행적 언어에 대한 그의 관점이 저항의 가능성을 해명해주지 못한다고 본다.”

     

      재거(2012:217)에 따르면 버틀러의 부르디외 비판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부르디외가 수행적 발화의 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또 하나는 수행성을 하비투스로 확장하지 못했다는 것. 

      ‘육체의 말하기’란 육체가 그것의 동일성의 근거이자 주권자, 또 원인(진정한 행위주체)으로 상정된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나 앎으로 환원되지 않는 수행(act; doing; performance)을 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말하기’는 정체성을 가진 ‘주체의 주관적 의도 말하기’가 아니다. 육체는 그것의 스타일 자체만으로도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공적 장에서 말하는 육체의 전시는 그 자체로 수행적 효과를 갖는다. 육체는 서명과도 같이 에끄리뛰르이다. 이는 육체가 텍스트로서 독해되며, 해석에 열린 기호라는 의미다. 

      “언어 행위는 몸의 행위이며, 수행문의 힘은 육체적인 힘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버틀러 2016[1997]:265) 왜냐하면 육체적 행위는 그 자신이 말하는 바에 대한 항상 알고 있다(knowing)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Butler 1997:141). 따라서 화행의 육체적 효과는 항상 화자의 의도를 넘어선다(Butler 1997:141). 다시 말해 언어행위가 수행적 힘을 갖는다는 말은 언어행위가 화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신체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은 반복가능성(iterability)의 사회적 중요성을 수용. 버틀러(2016:266)는 부르디외를 비판함으로써 어떻게 발화의 규범이 신체에 거주하게 되는지, 어떻게 발화주체를 생산하고 규제하는 규범이 주체의 신체화된 삶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발전시킨다(Jagger 2012:217-218). 심지어 검열된 발언도 관습의 위기를 가져오는 “반란적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1997:142). 버틀러는 스피박과 데리다를 활용하면서 공식적이고 검열된 언어도 상이한 목적에 따른 (탈/재)맥락화에 의해 전복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주권성에 기초한 ‘주체’ 개념을 그 통념에도 불구하고 탈주권적인 맥락으로 재기입함으로써 ‘주체’를 사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기존의 통념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담론에 있어서 언어오용의 효과는 오로지 특정한 방식으로 전통적으로 의미화되었던 용어가 다른 종류의 목적을 위해 전유될 때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주체’라는 용어가 주권성과 인식론적 투명성에 너무 구속되어 있을 때, 그 같은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다는 주장이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이를테면 탈주권적인 맥락에서 그 같은 용어를 재사용하는 것은, 그 같은 용어가 적용되는, 확고했던 맥락의 의미를 동요시키는 듯 하다(Butler 2016:270).

     

    반면 부르디외에서 검열된 공식적 언어는 그렇지 못하다. (언어와 상징권력) 부르디외는 “언어시장이 단일한 규범을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그러한 규범을 행위자들이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는, 그리하여 쉽게 변화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정”한다(이상길 2013:132).

     

    주체성과 상징폭력의 핵심에 있는 안정적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불안정성을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가. 재거(Jagger 2012: 212-13)는 부르디외가 버틀러보다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주목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버틀러가 수행성에 대한 설명에서 불안정성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부르디외 보다 나은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이론은 부르디외의 문제의 근원에 있는 ‘존재론적 공모’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체의 물질화 과정에서 비체(abject)와 이해불가능성에 주목한 버틀러는 가용한 범주와 폭력에 조응하지 않고 이항 프레임으로 감시되지 않는 신체들을 강조한다. 부르디외 식으로 보자면 기존에 정당화된 사회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분류체계(도식)에 포섭되지 않는 육체 스타일의 행동(퍼포먼스)이 반복됨으로써 끊임없이 이 분류체계의 범주와 경계를 위반하고, 나아가 이 체계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형성되기도 하지만 또한 형성적이기도” 한 하비투스가 확립된 의례나 제도의 권위를 초과하여 효과를 갖는 육체적 발화(발화하는 육체?)의 힘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긍정을 하면서도 “예측될 수 없는” “스캔들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버틀러 2016[1997]:289). “수행적인 발언은 그것들이 행동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이미) 사회적 권력을 지닌 자들이 발언할 때에만 오로지 효과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부르디외는 권력의 여백으로부터 출현하는 행위능력의 가능성을 무심코 배제한다”(버틀러 2016:290). -> 버틀러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수행적인 발언은 “집단적 인정(공모)의 생산과정(그로인한 전략생성) 속에서만 오로지 효과적” 

     

    • 부르디외 관점에서 버틀러에 대한 반론
    • 버틀러는 행위자를 분석할때 장을 생략. 우리는 행위자의 소우주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정당성에 도전하는 상징공간으로서 장

      차이의 반복가능성이 없다는 버틀러의 비판, 그리고 장과 하비투스의 궁극적인 공모 때문에 사회구조와 일치하는 변화만이 있고, 급진적 변화와 저항의 자리는 없다는 비판(Jagger 2012:216 참조)은 공통적으로 부르디외의 장 개념을 차이의 공간으로, 또 하비투스 개념을 복수의 장들과 연동된 복수의 성향체계들로 보지 못하고 한 인격체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수의 정체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김주환(2018)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사회적 의례의 반복이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버틀러가 장 개념을 투쟁이 없는 정태적이고 결정론적인 공간으로 오독한 것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또한 김주환(2018)에 따르면 부르디외의 사회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구분은 버틀러가 생각하듯, 맑스주의의 토대와 상부구조에 대응하는 구도가 아니다. 부르디외의 구분은 뒤르켐과 모스의 사회중심주의(sociocentrism)에 입각한 것으로 사회적인 것(집단들의 분류)과 언어적인 것(사물들의 분류)이 구조적 상동성을 갖지만 전자가 망각되어 후자가 자립적인 것으로 오인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지식사회학적” 기획이다. (사회의 이중적 기원/논리)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따라서 버틀러가 오해했듯이 경제결정론적 맑스주의처럼 사회적인 것이 언어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김주환은 더 나아가 뒤르켐의 종교사회학에서 성스러운 토템의 예를 통해 포스트구조주의의 ‘구성적 외부’ 및 버틀러의 동일성의 심급 없는 차이의 ‘반복가능성’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토템은 본래부터 성스러운 힘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토템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는 전혀 성스럽지 않다다. 그 말은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그 핵심으로서 초월적 심급이 애초부터 텅 비어 있는 의미 부재의 공간임을 의미하며, 사회는 그 자신이 정초되는 그 토대의 한복판에서부터 구멍이 나 있는 본질적으로 취약한 공간임을 뜻한다”(김주환 2018: 369). “종교적 또는 사회적 의례의 인위적이고 주기적인 반복을 통해 사후적으로 그 텅 빈 무의미의 자리를 끊임없이 성스러운 의미로 채워서, 그것이 원래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존재했다는 듯이 믿게 만들어야 사회의 완결성(intergrity)을 가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의례의 반복성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힘(social force)을 통해, 사회의 본래적인 취약성을 극복하고, 그럼으로써 사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김주환 2018: 369).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부르디외와 버틀러는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다만 뒤르켐과 모스는 사회의 취약성을 메우는 의례적 반복을 통한 사회나 질서의 성립 가능성을, 반면에 부르디외는 갈등과 투쟁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서의 역설을, 버틀러는 취약성 자체를 사회의 (불)가능성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뒤르켐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의례적 반복은 사회(질서)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의례적 반복의 초월적 규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집합적 실천의 산물이지만, 마치 의례적 반복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나 초월자처럼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인간집단의 실천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과정이 망각됨으로써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즉 사회가 신(성스러움)이라는 뒤르켐의 주장이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신성의 힘은 사실상 사회의 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의례적 반복을 행함으로써 “신성의 힘이 사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사고”된다(김주환 2018: 372). 이 신 또는 성스러움을 젠더질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이것이 육체가 자연적 물질이 아니라, 역사적 담론 안에서 수행적 과정을 통해서, “마치 자연적 형태인 것처럼”(Butler 1989:254), “물질화(materialize)”된 “물질성(materiality)”(Butler 1993:9-10)이라는 버틀러의 주장과도 다르지 않다.5

     

     

    부르디외와 버틀러의 상호 비판의 핵심은 언어의 본성과 상징폭력에서 언어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불일치에 있다(Jagger 2012:213 참조). 재거(Jagger 2012:213)에 따르면 체화된 주체의 수행적 생산에 대한 버틀러의 설명은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 따라, 우리를 육체성을 갖는 주체로서 구성하는 범주화, 구별짓기, 사회적 권력, 규범, 규제의 과정에 의한 기제들을 찾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한다. 또한 포스트구조주의는 체화된 주체가 문화적 이해(불)가능성을 성취하는 과정을 통해서 규제적 프레임과 의미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육체적 특수성 보다는 그것의 물질성(materiality)으로서 ‘실재’로 여겨지는 것(apparent ‘reality’)의 생산 안에서 언어와 의미의 역할에 초점을 둔다. 

      반면에 부르디외는 푸코 및 데리다를 비과학적인 포스트모던 주관주의라고 비판했다. 부르디외의 출발점은 지각은 체화된 것이며 순수하게 인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다. 이에 따르면 체화된 주체성은 항상 구체적인 사회적 설정에서 상황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버틀러와 마찬가지로 현상학을 도입해 놓고도 궁극적으로는 현상학적 접근을 기각한다. 

      아울러 부르디외는 화행이론을 도입함에도 불구하고 버틀러, 데리다와는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부르디외(Bourdieu 2001[1998]:102-104)는 구조, 젠더질서의 강고한 힘을 강조하면서도 버틀러의 언어적 명목론은 기각했다(확인요). 왜냐하면 언어를 현실(reality)로 착각하고 사회적 제도의 역할과 의미를 객관적 구조로 간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극복하려는 “이원론은 사물(구조)과 육체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말로 명명하는 단순한 효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수행적 마법 행위에 의해서 폐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드랙퀸’처럼) 의지대로 수행되는 단순한 ‘역할’과 달리, 젠더는 그 강고한 힘을 충동하는 육체와 세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혐오발언과 같이 말의 수행적 효과를 만드는 것도 젠더 질서이고 전복적 자원주의의 가짜 혁명적 재정의에 저항하는 것도 젠더 질서이다”(Bourdieu 2001: 103). 여기에서 부르디외는 각주(n. 37)를 통해 버틀러(Gender Trouble)가 젠더에 대한 자원주의적 견해를 기각함을 밝히는데, 적어도 이 인용에서만큼은 부르디외와 버틀러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젠더 수행성에 대한 오해를 이것이다: 우리가 마치 아침에 옷을 입는 것처럼 젠더가 선택이나 역할 또는 구성이라는 것이다”(Butler 1993:94; Bourdieu 2001: 103n에서 재인용). 

      또한 부르디외는 버틀러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를 사회구성주의로 간주하고 비판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언어를 바꾸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 성, 국가, 민족, 인종이 사회적 구성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해롭지 않지만,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저항”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회적 구성물들을 “해체”하면 된다고 가정하고 또 제안하는 것은 순진하고 심지어 위험하다는 것이다(Jagger 2012:215; 파스칼적 명상). 

      왜냐하면 부르디외에게 실재는 객관적 구조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구조는 하비투스에 외재적이고 하비투스 안에 육화되어 있기에 신체는 사회세계 구조의 육화된 형식이다. 재거(Jagger 2012:215)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은 언어와는 상관이 없다. 버틀러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디외에게서 언어가 사실상 객관적 구조와 지배관계를 반영하는 표현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부르디외에게 언어는 버틀러와 달리 구성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상징폭력은 전성찰적, 언어 이전의 차원에서 작동하며 객관적 구조는 하비투스를 통해서 상징폭력을 가한다. 이에 따라 선택을 조종하고 전략적 행동을 창출하는 실천적 지식은 이중적으로 제약되는데, 객관적 구조(장)와, 장과 하비투스와의 공모관계 속에 있는 상징폭력(오인된 도식)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거의 비평은 보다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부르디외는 이론적 모델의 지식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이론적 언어가 실천적 과정 속에서 전략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임을 지적하기 때문이다(Bourdieu 1990:40). 다시 말하면 부르디외에게서 언어는 사회적/상징적 분류체계의 범주와 경계를 재설정하는 해석투쟁의 도구이기에 단지 표현의 도구라는 재거의 비평은 지나친 것이다. 또한 버틀러(2017: 292)와 재거의 비판은 사회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을 경제결정론적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의 도식과 동일시함으로써 부르디외의 사회중심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버틀러는 수행문의 탈맥락화 또는 실패가 역설적이게도 수행문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문의 “내재하는 외부” 내지 ‘구성적 외부’이자 “법”이라는 데리다(1988:17)의 주장을 수용한다. 아울러 에크리뛰르의 인용가능성과 반복가능성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를 통해 초월적 심급(의미의 동일성, 최종성)이 없이도 작용하는 수행성의 탈맥락화와 재의미화의 힘을 설명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데리다가 반복가능성과 탈맥락화의 사회적 의례의 차원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기호의 구조적 특징으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적 분석의 차원을 놓쳤다고 비판했다(Butler 2016: 276; 김주환 2018: 363-364 참조). “데리다는 언어의 구조적인 차원을 의미론에 대립시키며 사회적인 잔여물이 명백히 정화된 구조적인 것의 자율적인 작동을 설명한다 … 그는 반복 가능성을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언어의 기능으로 보는 오스틴적인 설명에 분명히 반대한다. 데리다에게 관습 특유의 반복 가능성은 모든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고려와 분리될 수 있는 듯 보이는 구조적인 지위를 가진다”(버틀러 2016:277).

     

    • 예컨대 서명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서명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적절성 조건은 무엇인가? 데리다와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 차이의 반복가능성, 탈맥락화, 재맥락화로서 하비투스: ‘규칙 따르기’ 논의를 통해

      버틀러는 부르디외를 비판하기 위해, 즉 데리다를 해설하면서 수행문의 힘이 탈맥락화 및 재맥락화에 있음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하비투스 역시 탈맥락화 및 재맥락화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버틀러는 하비투스 개념이 “자신의 육체적 수행성 논의와 많은 부분 공명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우호적으로 평가한다”(김주환 2018: 374). 심지어 부르디외와 데리다가 “함께 고려된다면, 언어 행위에 대한 사회적 반복 가능성의 이론”이 될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버틀러 2017: 282). 

      이하에서는 하비투스가 ‘규칙 따르기’가 함의하는 ‘의미한정주의’로 이해되기에, 데리다의 ‘반복가능성’에 대한 버틀러의 독해인 ‘맥락의 한정 불가능성’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버틀러의 부르디외 비판이 힘을 잃는다는 점을 보이겠다. 수행문이 힘을 갖는 이유는 반복가능성 때문인데, 이것은 어떠한 공식이 다양한 맥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그 공식이” “특정한 맥락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버틀러 2016:275). “맥락의 ‘한정 불가능성’은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맥락에 대한 모든 규정이 그 자체로 추가적인 맥락화에 종속된다는 것을, 맥락은 단일한 형태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맥락을 규정하려는 모든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그러한 모든 규정이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정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버틀러 2016:275-76 밑줄강조는 필자).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세 가지 정도의 요점 또는 쟁점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로 버틀러가 찰스 테일러의 부르디외 해설을 수용했듯이(버틀러 2016:252-53 참조), 하비투스는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rule-following)’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규칙에 대한 이해 - 더 정확히는 규칙을 따를 수 있는 능력 - 가 규칙에 대한 의식적 재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말은 규칙의 적용(실천)에 앞서서 규칙의 의미(해석)를 확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모든 실천적 행위는 언제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소위 ‘규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미래의 맥락에 항상 열려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규칙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규칙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규칙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할 수 없을 때조차 규칙을 따를 수 있다. 그래서 부르디외와 테일러는 규칙이 단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화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사회)가 모든 행위를 저마다 상이한 맥락에 따라 제각각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하느냐는 것이다. 버틀러는 발화가 규칙의 재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 상징폭력 개념 재고: 상징폭력의 불안정성(중력 유비)

    상징폭력의 불안정성을 인식하는 것은 부르디외의 결정론적 경향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Jagger 2012:223). 이하에서 필자는 상징폭력의 사례로서 토템 논의를 통해 객관적인 구조와 주관적인 의미, 물질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관계성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상징폭력 개념이 저항가능성을 허용하는 개념임을 주장한다. 버틀러(1997)는 이미 상징폭력이 저항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부르디외 이론 안에서 내재적으로 논증하기보다는 데리다를 통해서 대안적 개념과 시나리오를 제시함으로써 비판했는데, 나는 여기서 상징폭력 개념 안에 그 저항가능성의 함의가 이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오해를 교정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상징폭력과 독사의 개념 간의 구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재거는 그의 논문(2012)에서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서 부르디외와 버틀러, 각각의 입장에서 상호비판하고 비교/대조했다. 이 과정에서 재거는 버틀러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버틀러는 부르디외를 비판하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속성들이 배치되는 (이른바) 객관적 구조는 우리의 의미체계와 독립적인 세계의 산물이 아니라고 강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012:216).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미체계 바깥에서 그러한 토대가 되는 객관적 구조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2012:216). 따라서 객관적 구조는 원인이 아니라 효과인데, 이를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미체계다. 즉 의미체계는 “권력관계에 물든 차이의 체계를 포함함으로써 객관적 구조”(2012:216)는 인과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부르디외가 분류체계를 포함하는 객관적 (비개념적, 인과적) 구조로 간주하는 것은 버틀러에게는 의미체계의 물질적 결과”이다(강조는 원문). 그래서 “부르디외가 장이라고 부른 젠더실천과 사회제도들은” “지배의 물질적 토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산물이다”(2012:216 강조는 원문). 재거에 따르면 버틀러에게 이성애는 규제적 이념과 권력/지식체제이다(2012:216).

     

    • 버틀러가 상징폭력 개념을 비판하는 핵심

    동성애와 양성애는 이성애 규범의 ‘구성적 외부’로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것’은 완전히 문화 안에 있지만 지배문화로부터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Butler 1999:99). “그래서 대안적 권력은 욕망하는 주체의 심연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규범의 역설적인 ‘구성적 외부’를 착취하는 제한적 실천과 정체성 안에서 구성된다. 이러한 배제된 실천적 정체성들은 영원히 헤게모니적 규범을 위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헤게모니적 규범의 구성(또는 헌법)을 도우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헤게모니적 규범의 현존을 뒷받침하는 부재로서 암시되기 때문이다”(Boucher 2006:117). 버틀러의 관점에서 상징폭력과 하비투스 개념은 행위자를 언제나 문화 안에서 완전히 사회화된 존재로 간주한다. 

     

    • 버틀러에 대한 비판들

      사라 살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저항적 발언이 정치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강자들의 양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버틀러는 결국에 강자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의무론적 도덕철학” 또는 “타자 윤리학”에 근접(Salih 2002:2). 윤리적 전환(Boucher 2006).

      벤하비브는 버틀러가 주체를 언어 속의 또다른 위치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율적인 언어행위를 수행할 수 없음(Lloyd 2007:58)

      맥내이는 버틀러의 행위자성은 추상적인 구조적 잠재성(McNay 2000:46)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비판(Boucher 2006; 김주환 2018).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은 “고립된 개인의 관점에 국한”되어 있다(Boucher 2006:114). 제프 보처(Boucher 2006)는 문화적 관점 안에서 형성된 주체형성에 대한 개인주의적 설명의 한계를 나타내는 불연속성을 그녀의 이론적 작업의 궤적 속에서 드러낸다. 보처(2006: 115)에 따르면, 버틀러의 해법은 저항과 전복의 잠재력을 개인들이 차지하는 문화적으로 각본화된 주체 위치의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탈각된 지향성(disembodied intentionality)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버틀러의 이론은 집회의 정치적 운동을 설명하기에는 명확하나, 권위에 대한 수행적 주장(저항)이 그 자체로 효과적인지는 불분명하다(Lawler 2004:122) 

     

    김주환(2018): 부르디외의 입장(언어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의 통합, 저항적 언어행위의 적절성 조건을 강조)에 대한 버틀러의 오해(부르디외는 구조결정론)를 교정한 점은 옳았지만, 버틀러가 영웅적 주체의 개인적 저항과 자원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재고할 여지가 있음.

     

    • 재거(2012)

    현실정치적 차원에서 수행성의 정치적 전복효과의 실효성에 의문. 수행성 정치가 정치공동체의 합법적인 제도나 경제적, 물질적 요소와의 관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음. 인정투쟁 양상에 집중. 수행성의 정치는 법과 제도라는 현실적 벽에 부딪힘(심지어 그래서 사라지는 사례로서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낙선운동 예시). 이러한 “합법성의 딜레마”를 안고 있음. 아울러 “유사행위의 반복성이라는 수행성 정치의 기본가정은 실제적인 실천력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비판.

    -> 인용과 반복의 지향적 동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버틀러 수행성 이론?

     

    재거(2012)는 젠더를 사회구조로 보는 부르디외의 설명이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보다 저항과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 더 낫다는 주장에 반대하고, 대신에 부르디외의 하비투스와 버틀러의 수행성에 대한 상호간의 비판을 독해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본다. 구조결정론을 벗어나 저항과 변화에 대한 보다 강력한 설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상대방의 통찰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226).

    이를 위해 재거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를 버틀러의 수행성의 관점에서, 동시에 반대로, 후자를 전자의 관점에서 독해하자고 제안했다. 

    먼저, 재거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를 버틀러의 수행성의 맥락에서 독해할 때, 구조결정론을 발생시키는 부르디외의 저항과 변화의 교착상태를 벗어나는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통해 재고하는 것은 하비투스, 육체적 헥시스, 실천감각과 같은 핵심적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는 주체성의 사회학적 설명인 사회화와 규범의 소극적 내면화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의 근원을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225). 

    결론적으로 재거는 수행성 개념을 통해서 부르디외의 이론이 주체성의 핵심인 불안정성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더 섬세하게 조율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수행성으로의 전환은 유일하게 진정한 객관적 실재로서 특수한 역사적 해석의 물화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225).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부르디외 이론의 구조결정론적 오해를 기각하는 것, 구체적으로, 이 오해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하비투스의 ‘과잉 내면화’(이상길 2013:131; Thompson 1995) 기제와 ‘무의식 이론(unconsciousness theory)’(Alexander 1995), 그리고 하비투스와 장의 ‘존재론적 공모’ 테제를 재검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하비투스와 장의 관계가 이러한 물화를 극복하기 위한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하비투스와 장의 복수성을 부각시키고 “하비투스의 ‘강한’ 용법”(이상길 2013:134)을 재교정함으로써 하비투스가 보여주는 부르디외의 내면화 이론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비판(Alexander 1995 :147 참조)도 기각할 것이다. 

     

    이상길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성과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위계구조의 복잡성과 다중심성에 주목하고 ‘사회구조와 하비투스의 즉각적 일치’라든지 ‘오인’과 같은 개념을 비판적으로 전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시각에서 언어를 포함한 문화적 가치의 위계체계는 강력한 단일성과 응집성을 지니고 있기보다 상황에 따르는 일정한 균열과 부정교합, 다원성과 유동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또 개인 행위자는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유연하게 이용 가능한 복수의 믿음체계(régimes de croyance)와 행동논리를 가지는 존재로 나타난다(Cf. Lahire 1998). 이론적 대안을 체계화할 때, 우리는 상징폭력의 편재성과 사회적 효과를 과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폭력으로 환원함으로써 ‘규범의 정치’의 가능성을 최소화한 채 ‘과학의 정치’에 호소하게 되는 딜레마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상길 2013:133).

     

    한편 재거는 하비투스가 수행적 과정의 사회적 논리를 보다 특별하게 강조하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하비투스를 통해 수행성을 독해한다면 수행적 과정에서 육체의 역할을 상세히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수행적 과정을 보다 안전하게 고정시키며, 체화되고 반복되는 사회적 규범의 수행성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225). 다만 재거는 버틀러의 설명이 보다 사회학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사회적, 역사적 해석을 반복가능성과 구성의 과정 밖에서 물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거는 사회학적 설명은 시간성, 해석, 차이 또는 반복가능성의 과정을 따르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보다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성이나 불안정성과 같은 요인을 통해 사회학적 설명의 섬세함을 요구하는 재거의 올바른 주장이 부르디외의 이론에 대한 섬세하고 깊이있는 해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게 된다. 재거는 양자의 입장을 비교적 타협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의 이론을 실천적 구성과정의 물화로 단순하게 이해했다. 주지하다시피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을 실천이론(실천의 일반경제학)과 발생구조주의, 그리고 구성주의적 구조주의로 규정했다. 실천이론은 행위의 창조성이나 불안정성을 적절성 조건 하에서 규명하려는 시도다. 또한 재거의 수사는 정반대로도 사용될 수 있다. 가령 버틀러의 수행성 철학은 미시적 실천을 ‘가능성’이라는 수사로 이상화하기에, 이 실천들을 포획하는 사회적 조건들, 즉 사회적 규칙과 제도, 문화적 질서를 일관되게 설명하기 못한다. 따라서 부르디외의 설명에 적절성의 사회적 조건을 벗어나는 가능성의 철학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버틀러의 이론은 부르디외에 비해 수행성의 적절성 조건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 육체화된 주체의 구성 속에 있는 사회적 권력과 권력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동시에 이론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와 버틀러의 수행성, 신체의 물질화 개념의 비교/대조

     

    • 부르디외와 버틀러의 공통점: 생물학적 환원주의 기각. 젠더를 자연화하는 상징질서의 역할 강조 ->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젠더 분할

     

    • 부르디외의 강점:

    젠더화된 주체가 권력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기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학적 설명을 제공(210). 젠더를 하비투스로, 즉 “사회적 구별짓기의 원리인 임의적 노모스가 구현(embodiment)된 결과물”로 보게끔(210). 이 젠더 하비투스는 남성지배 관계의 신체화(somatisation)를 가능케 하고 모든 장을 가로질러 남성지배의 정당화가 가능하도록 전성찰적 차원에서 작동한다(210). 다시 말해 (남성)지배관계는 젠더화된 하비투스(인지평가도식, 실천감각)가 되고, 여기에서 젠더화된 실천이 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하비투스는 장과의 (부)조응관계가 시험되고 이 관계 속에서 전략적 행동이 출현한다. 

     

    • 부르디외의 문제점: 

    남성지배관계가 전성찰적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장 구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고 주장(210). “만일 <남성지배>에서 부르디외의 주장을 따른다면 서구에서 여성 지위의 사회적/법적 변화는 저항과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규제된 자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10). 부르디외의 이러한 관점은 여성운동의 성과를 반영하거나 설명하지 못해 결국 비관적인 결정론과 남성중심적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210-211). 이것이 부르디외가 자신의 남성 지위(인식론적 특권과 상징폭력)를 성찰하지 못했다는 페미니스트 비판의 주된 이유다(Adkins and Skeggs 2004 참조).

     

    재거가 앞서 언급한 페미니스트적 성찰성 비판 보다 중시하는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다. 재거는 주체성의 문제를 젠더화된 신체를 이론화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선결과제로 보았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구조결정론에 지속적으로 방해 받을 것이다. 부르디외의 문제는 하비투스의 이론적 강점이 “하비투스/장 관계의 핵심에서 주체성에 대한 부르디외의 불충분한 설명에 의해 약화”(211)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수행적 발화에 대한 부르디외의 설명이 발화행위의 힘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라고 주장하기 위해 데라다의 견해에 따라 그것이 본질적으로 반복적이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전의 맥락과 단절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수행적 발화의 힘은 사회적 의례의 맥락의 고정에서 그리고/또는 발화자의 권력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반복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통해 생각해볼때, 수행적 발화의 힘은 발화자의 권위나 사회적 의례의 맥락고정보다는 반복가능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맥락과의 단절(따라서 맥락을 고정하는 데 실패)이 모든 발화행위의 조건이고 따라서 내재적인 구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관심사는 문자소적(graphematic), 따라서 모든 위치, 모든 표시, 의미체계(즉 차이)의 반복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218). 이것은 해석, 경험, 의미, 주체성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인데,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독립적인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버틀러는 관습적이든 아니든 간에 체화되고 반복되는 사회적 규범들의 수행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구조적 필연성의 사회적 논리를 가져오길 원한다(물론 사회적 의례에 대한 부르디외적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녀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와 데리다의 수행성 및 반복가능성의 재작업을 결합함으로써 화행에 대한 자신의 설명에서 이 목적을 더욱 강화한다. 이것이 그녀가 ‘화행의 사회적 반복가능성’(1997:152)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버틀러에게 수행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보다 특별한 사회적 논리를 강조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하비투스는 발화가 육체적 행위이고 따라서 화행은 언어적인 동시적 육체적임을, 결과적으로 그녀의 설명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설명하도록 돕는다(219).

      결과적으로 버틀러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나 상징적 규범과 사회적 정치적 구조 간의 관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맥내이와 같은 비판들은 요점을 놓쳤다. 그러한 비판들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의 구성을 사회적 구성의 밖에서 보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가지 요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구성과 반복가능성의 과정 밖에서 역사의 해석이나 사회적인 것의 특수한 묘사의 물화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언어적 구조는 또한 본질적이으로 반복가능한 것이고 언어적 구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수행성과 언어에 대한 버틀러의 설명이 사회적 논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화되고 반복되는 사회적 규범의 수행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체화된 사회적 규범은 그 자체로 반복가능성의 작용에 열려있다(219). 

      수행적 발화에 대한 부르디외의 설명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의 두번째 부분은 부르디외가 육체적 지식과 하비투스의 발생적 능력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수행성의 이론과 연결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부르디외가 화행의 수행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그가 사회적 실재의 타당한 묘사를 이론적 구성이 잘못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지성주의나 ‘학자적 관점’에 대한 그의 비판에만 관련된다. 그는 하비투스와 장 관계를 재사유하는 하비투스에 대한 설명에서 이 통찰을 가져오지 않는다(219). 버틀러는 수행성의 관점에서 하비투스를 사유하는 것이 결정론을 피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행성의 관점에서 하비투스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간의 구별을 약화시키도록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방향 하비투스를 (담론적 권력의 재전유를 통해서) 담론적 재절합의 가능성과 시간성의 개념을 포함하는 모방적 통합의 장 과정 재형성하는 것을 수반해야할 것이다. 수행성의 관점에서 하비투스 장 관계를 재사유하는 것은 또한 (아래에서 논의될 반복과 호명의 반복된 과정으로서) 시간성의 개념을 사회적 장의 ‘객관적’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장에 관한 설명에서 결핍된 것이고 장 안에서 하비투스의 침잠은 사회적 위치의 문제로서 거의 ‘공간화된’ 용어로 묘사된다(Butler 1999:125). 사회적 구조를 객관적 위치로 간주하는 것은 시간성을 전유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장 안에 ‘위치들’이 또한 반복가능성의 논리에 의존하는 방식을 무시한다. 그래서 이는 주체성에 대한 부르디외의 설명이 주체성의 핵심에 있는 불안정성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구조(또는 구조화된 사회적 위치들)에 대한 설명 역시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젠더관계 분석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수행성의 관점에서 하비투스 장 관계를 재고하는 것은 <남성지배>에서 남성지배 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효과적으로 초역사적인 설명에 대한 구조적 결정론과 비관론을 말할 때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 것이다(220).  

      따라서 “수행성의 사회적 마법”에서 버틀러(1999)는 부르디외의 작업에 대한 비판과 하비투스의 수행성 - 암묵적 수행성에 대한 설명을 더욱 발전시킨다. 특별히 그녀는 부르디외의 설명에서 상징폭력의 힘을 추동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적 마법이라는 생각에 도전한다. 부르디외에게 상징폭력은 마치 마법과도 같이 지배관계의 통합을 보장하고, 하비투스와 육체적 헥시스 안에서 행동을 형성하는, 보고 믿고 행동하는, 사회적으로 적절한 방식을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버틀러(1999:126 fn.2)는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설명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설명 간의 유비를 사용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주체성의 구성에서 명명하기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알튀세르(1971)의 호명을 사용하는 버틀러는 사회적 마법의 아이디어가 이 과정에 있는 시간성과 반복가능성을 포착하여 수행성에 관한 설명으로 더 잘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명이 지속적으로 호출되는 방식, 즉 자신의 사회적 마법을 수행하는 육체적 스타일의 형태를 지속적으로 갖추는 방식은 수행성의 암묵적이고 육체적 운용을 구성한다”(1997:153[2016:285]). 이러한 호명은 시간을 통해 의례화되고 침전된 사회적 수행으로, 그것은 “참여적 하비투스(the participatory habitus)”(153)에서 주체형성과정에서 시간적 측면을 강조한다. 게다가 여기에서 버틀러의 목적은, 수행성의 관점에서 호명을 재고하는데 있어서, 주체성이 담론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주체의 담론적 구성이 주체의 사회적 구성에 불가분하게 얽매여 있다”(154)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체화된 주체성의 담론적 구성에 대한 버틀러의 설명이 그 담론적 구성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맥내이의 비판과 대조적으로 사회적인 것은 불가피하게 담론적이며, 사회적 맥락은 시간적 과정의 바깥에서 고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재고하는 것은 또한 “지배적인 사회적 질서의 전복적 영토화와 재의미화를 위한 배경을 제공한다”(154). … 주체성은 반복가능한 지속적인 과정 … (1997:160; 1999:125). 따라서 수행성은 단박에 구축되는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체화된 주체로서 체화된 주체로서 체화된 주체의 구성에 

     

    • 양자 중재 또는 매개

    Jagger. 2012.

    라울러(Lawler 2004)는 부르디외 뿐만 아니라, 푸코나 버틀러 역시 권력의 순응과 저항(또는 해방)은 역설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함. 순응과 저항의 개별적인 형태와 지배체제의 전복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역설(2004:122).  

    Julia C. Nentwicha, Mustafa F. Ozbilginb and Ahu Tatli. 2015 

     

     

    • 저항과 사회변동

    부르디외: 장과 하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 -> 규범의 체화 성공 -> 순응(X), 실천전략(O) -> 집단에 호소, 인정 -> 사회변동 

    버틀러: 반복가능성 -> 규범의 체화 실패 -> 저항 -> 사회변동

     

    버틀러는 사회변동이 체화 실패, 화행의 불안정성에 의해서라면 세계는 왜 무질서하고 급격하게 매번 변화하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가를 설명 못함. 차이나는 반복의 화행이 축적되는 어느 순간에 비화하는지 임계점(양질전환)을 설명못함.  

     

    버틀러는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 화행의 우연적 효과를 언어적 규범으로 완전히 체화되지 않는 몸, 즉 언어와 몸의 균열 내지 부조화로 설명한다. 하지만 수행성의 우연성은 오로지 몸의 문제인가? 내면화의 실패 또는 규범과 신체의 불일치만이 수행적 효과를 발생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알렉산더는 수행성의 우연성을 그야말로 공연을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융합하지 못한 상태로 설명한다. 

     

    전통적인 맑스주의 비판이론에서 해방의 기획 관점에서 부르디외와 버틀러를 비교하거나 대질시켜볼 수 있다. 부르디외는 성찰성을 결여한 지식인중심주의적 비판이론들을 비판하고 행위자들의 일상적 실천의 중요성에 기반한 실천이론과 성찰적 사회학을 주장했지만 그 역시 지식인의 인식론적 우월성을 은연중에 도입함으로써 비판이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김경만 2005 참조). 한편 버틀러는 자신의 이론을 포스트 맑스주의의 해방 기획과의 차별화하고자 했다(Boucher 2006:112).  

     

     

    조지훈은 수행성이 “실천 속에 내포된 억압과 해방의 계기를 읽어내기에 유용한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버틀러의 논의가 해방적 정치에 얼마나 실제로 효과적인가를 묻는 질문은 주소가 틀렸다”고 비판하면서 “버틀러는 수행성 개념을 통해 개별적인 실천들에게 해방적 계기를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지, 각각의 실천들이 어떻게 사회 제도와 법을 바꾸어낼 수 있을 지에 대한 전략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019:63). 필자 역시 버틀러를 이같이 해석하는 것이 양자 간의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버틀러가 사회 제도와 권력의 집단적 정당성에 관심을 갖는 부르디외를 비판한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버틀러가 단지 “개별적인 실천들에서 해방적 계기를 읽어내는 데”만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로이드에 따르면, 버틀러는 단지 어떤 주어진 맥락에서 패러디적 행위의 결과를 묘사하고 처방을 내린 것만이 아니라, “전복의 정치학의 시도”(Lloyd 1999: 209), 즉 미래 정치 행동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 것이(Mills 2000:275). 또 어떤 담론이나 실천의 무계획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이 정치적 전술 계획의 무의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Lloyd 1999:210), 버틀러의 기획은 부르디외의 기획과 함께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버틀러 : 부르디외 = 개별적 저항실천 : 집단적 권력, 이러한 항등식은 양자의 이론적 기능을 분담하고 중재하는 장점을 지니지만 동시에 각각의 이론적 주장을 단순화할 우려도 있다. 한편 전혜은은 버틀러를 “그저 사적 영역에 국한된 개인적 실천”이라는 비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패러디적 재전유는 집단적인 정치 행동의 일환으로 실제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다르게 반복하고 재인용함으로써 패러디적 재전유를 효과적인 집단적 정치 실천으로 상연”하는 “연극성의 정치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2021:201-202; 242 n.96). 따라서 양자의 첨예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버틀러의 부르디외 비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비교적 부르디외적 입장에서 버틀러를 기각하려는 반론(Clarke 2000; 김주환 2018) 역시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 

     

     

    대개의 이론들 간의 관계가 그러하겠지만, 이 양자의 관계도 복잡하며 여러 쟁점을 가질 것이다. 양자의 이론적 쟁점이나 개념들도 상호 간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조금 과장해서 보자면, 특히나 전통과 학제를 달리하는 이론들 간의 비교나 대조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ility)하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통약불가능성이 반드시 비교와 소통의 불가능성과 평가 불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샤록, 리드 2005). 통약불가능성 개념이 이론 비교 연구에서 시사하는 바는 특정한 문제틀 하에서만 대화지점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렌즈 조리개처럼 특정한 시공간의 대상에 초점을 둘 때에야 비로소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크로치는 부르디외가 규칙과 규칙성의 관계를 사회학 연구에 활용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일단 크로치는 규칙을 “발화된 실체”로, 규칙성을 “사람들이 규칙을 발화하게 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반복적 행동 패턴”으로 정의한다(2015:335). 

     

     

    규칙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동일한 행동이 발생하도록 보장하는 장치다. 어떤 개념의 적용(실천)이 선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실천적 행위를 ‘규칙(따르기)’이라고 했을 때, 행위자들은 반복되는 패턴 역시 반복(차이) 그 자체로 놔두지 않고 동일성/비동일성 여부를 판단한다. 

     

     

    쾨글러에 따르면, 각 이론들이 수행적 규칙이 맥락초월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여주는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이란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이다(하홍규 2014:209).

     

    “우리의 규칙과 규칙 지배된 실천을 유지시키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의 합의이다. 일단 이것이 인식되면, 우리는 규범적 실천에 올바르게 참여하는 것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은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정당화와 설명, 행동과 반응의 연동 패턴으로 구성된 것에 대해서이다”(Bernasconi-Kohn 2007:85).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부르디외 자신과 많은 해설자들이 지적했다시피, 스포츠 게임 은유에도 불구하고, 주어지고 명시화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천적 활동을 하는 가운데 사용됨으로써 실체적 효력을 갖는 규칙을, 행위자들이 자기 수행과 상황의 근거로 삼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효력을 정당화하는 실천이다. 이로써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수행적 실천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규칙은 상황에 적합한 전략으로 사용됨으로써 행위주체의 주관적 의미로 재기입된다. 규칙과 행위주체의 수행적 활동 간의 변증법인 것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규칙 따르기는 의지주의(intellectualism)을 비판한다. 이는 부르디외의 의지주의, 객관주의 비판 취지와도 같다. 이러한 함의는 저항의 이상적 모델이나 방법이 이론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정해져 있지 않다는 버틀러의 취지와 공명한다. 

    따라서 하비투스는 언제나 어떤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규칙에 대한 일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육체적 헥시스로서 작동하고 사회적 공간에서 상연된다. 그러므로 육체적 헥시스(하비투스)는 물화된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고 기호화된 상징으로서 정체성을 구성(내지 호명)해낸다. (버틀러는 하비투스를 호명과 동일시했지만, 본고에서는 여백 없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육체가 담론적으로 구성됨에도 불구하고 담론을 초과한다는 버틀러의 논리와 유사하다. 버틀러는 ‘말하는 몸’이 말하는 순간에 말과 몸은 분리된다고 주장한다.    

     

    “몸의 아비투스는 체화된 주체가 행위하는 사회적인 게임을 지배하는 무언의 규범성에 의해 생성된다. 이런 점에서 몸은 정해진 사회적 영역의 맥락의 규칙들을 따라 아비투스의 규칙과 유사한 성질을 전유한다

     

     

    버틀러의 패러디적 저항(‘반복 복종’) 

     조현준에 따르면,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호명할 때 그에 응답함으로써 탄생하는 것이라면, 버틀러의 주체는 그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분을 둠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주체다. 즉 규범 속에 주체의 몸은 규제 속에 몸의 틀을 잡고 몸에 규제를 가하는 동시에, 반복된 규제복종 행위 속에 자기도 모르게 그 규제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2016:44). 

     

    퍼포먼스에서 최종성을 갖지 않는 육체적 하비투스

     

    쾨글러는 하비투스의 구조결정론적 측면을 극복하기 위해 하비투스를 “행위자 기반의 지향적 능력”으로 볼 것을 제안하고, 하비투스의 상징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렇게 했을 때, “구조는 외부에 영향 받지 않는 개인 위에 외부적으로 덧댄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로서 행위자가 의지하는 것을 정의하는 내부 자원으로서, 자기 이해의 내적 인지적 차원으로서, 진정한 상징적 자원으로 보여진다”고 주장한다(2011:290). 규칙을 반복되는 실천을 포섭하는 범주적 상징으로, 규칙 따르기는 그러한 범주적 상징과 실제 적용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은 알렉산더가 규칙 따르기에 충실한 가핀클의 민속방법론을 해석할 때도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가핀클은 규칙이 ‘범주적 가능성(categorical possibilities)’을 제공한다고 믿었는데, 이는 행위자가 의도된 사건(intended events)으로 무의식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의도된 사건이라는 특수한 사례에 관한 모든 실제적 관찰들을 의도된 사건들이라는 관할권(jurisdiction) 하에’ 포함시키려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규칙 따르기(following rules)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규칙을 따른 게임(games following rules)이라기보다는, 규칙이 게임을 따른다(rules follow games)는 것과 같다!(Alexander 1987:254) 

     

    따라서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의 관점은 하비투스 안의 체화된 성향과 실천의 피드백 기제와 하비투스와 장 사이의 관계를 고정시키지 않는다. 기든스의 구조(규칙과 자원)와 실천 간의 이중해석학은 이러한 관점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맥락 내의 맥락적 배태성은 사실 단지 ‘규칙’ – 담론분석가 재구성할 수 있는 – 이 아니라, 실천적 능력, 즉 맥락 안에서 규칙을 적용하기 위해 배경을 형성하는 체화된 성향과 기술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적 규칙을 푸코와 부르디외는 의미의 형성으로 간주한다”(Kögler 2011:281).

     

     

    2) 헥시스와 도식

    발화수반행위 개념이 보여주듯이, 발화에는 발화 자체를 넘어서는 맥락이나 관습이 드러남으로써 사실상 그러한 맥락이나 관습이 포함하는 내용을 수행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말하기’도 육체의 표층적 이미지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행위하게 된다. 

    육체적 행위에 수반되는 내용은 헥시스, 도식

     

    하비투스의 불안정성, 하비투스의 탈맥락화와 재맥락화

    하비투스의 안정적 차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많은 지적이 있어왔다. 

     

    하버마스는 화용에서 전 이론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의사소통행위이론: 231)

     

    3) 하비투스로서 반복가능성

    반복가능성이라는 인용의 구조적 원리는 하비투스(전략적 실천을 생산하는 행위자의 능력)를 시사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정도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저항과 제약, 변화와 재생산의 아포리아를 해체하는 일은 어렵다. 

     

    또한 주체의 저항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그저 낭만화된 말잔치에 불과한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저항의 사회적 조건을 탐색하려는 부르디외를 비판하지만, 버틀러의 작업 역시 정치적 실천의 조건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버틀러의 수사는 

    통속적인 논평들에 합류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주장이 즉각적으로 정치적, 실천적 대안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상대방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론적 작업으로부터 정치적 효력이 즉각적으로 발생한다는 지식인의 특수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본 연구의 목적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데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누군간의 이론의 원본을 발굴하여 그를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추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빌려 읽을 수 있는 책이 되도록 항상 관리하고 갱시

    물론 잘못된 해석은 전적으로 본 연구자 탓이다.

     

     

     

     

    “발언의 권력과 의미는 과거의 맥락이나 ‘지위’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언은 자신이 수행하는 맥락과의 단절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획득한다. 과거의 맥락, 혹은 일상적인 용법과의 그 같은 단절은 수행문의 정치적 작동에서 핵심적이다”(버틀러 2016:271). 버틀러는 로자 파크스의 사례를 통해 “과거의 정당성 없는 적용이 미래의 형태라는 가능성을 부수어 열면서” “현존하고 있는 형태의 적법성에 도전하는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한다(버틀러 2016:274-275).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앞좌석에 앉았을 때, 그녀는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과거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남부의 인종분리적인 관습 때문에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과거의 권위를 갖지 못했던 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그녀는 그 행위에 어떤 권위를 부여했으며, 기존의 확립된 적법성 규범을 전복시키는 반란적인 과정을 시작했다”(버틀러 2016:275).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수행성의 핵심이 행위주체의 비목적성(비인과성), 의미의 공연성, 실천의 (미래)개방성, 육체의 재귀적(담론적) 구성에 있다고 보고, 이것이 규칙 따르기로서 하비투스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 부르디외의 전략적 실천이 임기응변적인 문화 활용 능력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버틀러의 주장과 공명 지점을 보고자 한다.

     

    담론권력에 의해 한계지어진 주체

    “주체의 행위능력은 주체의 소유물, 즉 내재적인 의지나 자유가 아니라 권력의 효과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약되기는 하지만, 미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주체가 일련의 배제를 통해서 발언 내에서 생산된다면, 이러한 근본적이고 형성적인 한계는 주체의 행위능력을 위한 장을 설정한다. 행위능력은 그런 배제의 조건 아래 가능해진다”(버틀러 2016:261-62). 

     

    버틀러와 부르디외를 중재할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이 논문은 먼저 선행연구들을 검토하면서, 미국의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실천에 대한 버틀러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에서는 수행성에서 그 적절성 조건과 상황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수행문(the performative) 또는 수행적 발화의 적절성 조건이란 사회학적으로 해명되어야 함을 강조할 것이다(2장). 그리고 버틀러의 수행성의 핵심이 반복가능성과 탈맥락화에 있음을 약술하면서, 버틀러의 하비투스 비판에 응답한다. 이 응답은 수행성이 사실상 맥락화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분리되기 어려우며, 나아가 수행적 힘의 적절성 조건으로서 하비투스를 시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수행성의 사회학적 이해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3장). 아울러 수행성의 공연적, 사회적 차원을 밝히겠다(4장). 마지막으로 하비투스의 ‘강한’ 용법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rule-following)’ 논의를 통해 ‘약한’ 것으로 재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비투스의 수행성을 논하겠다. 즉 ‘규칙 따르기’가 수행의 불안정성과 위반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수행성과 하비투스 간의 중재 또는 접점을 형성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잠정적으로 제안할 것이다(5장). 결론에서는 수행성 이론이 불안정성과 탈맥락화(인용가능성)의 반란적 힘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맥락화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려해야한다는 점을 역설할 것이다. 

     

     

    1 랑그는 파롤의 실행을 통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는 화자들 속에 저장된 보물이며, 각 뇌리 속에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모든 개인의 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 는 문법 체계이다. 왜냐하면 랑그란 그 어느 개인 속에서도 완전할 수가 없고, 집단 속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Saussure, 2006[1974]: 20)

    2 의식적인 의미해석과 의미론적 정당화가 정당화하는 집합적 실천의 필요조건인 까닭은 동질적인 문화 내에서 전자는 생략될 수 있고 무의식적인 실천만으로도 집합적 정당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미해석은 사후적인 정당화에 동원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명료하게 의식적으로 해석하여 진술하지 못해도 화행의 적절성 여부를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의식적인 의미해석과 의미론적 차원에서의 정당화는 가치론적 판단 이후에도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   

    3 이러한 사유를 급진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라투르의 ANT이며, 행위주체를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것이 신유물론이다. 행위자가 사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효과를 인정할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의 구성에 연루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들을 행위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 

    4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효과는 이해 여부와는 동일시될 수 없다. 즉 수행적 효과는 규범화된 규칙으로 환원할 수 없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사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효과적인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효과는 사후적으로 언제든지 의미있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인지적 사실(이해가능성)이 항상 언어의 힘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규칙 따르기가 규칙에 대한 해석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후자가 전자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행동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Wittgenstein 1968:§201)

    5 또 이런 의미에서 버틀러의 육체 개념은 최종성을 갖지 않는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선언이다. 따라서 육체라는 표현적 실재는 사회적 공연무대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의미화될 수 있다. 버틀러가 젠더 관계들의 매트릭스가 “있다(there is)”고 표현한 것은 “존재론적 기인(ontological ascription)의 [언어적, 철학적] 관습”, 즉 “이리가레의 표현처럼, 철학적 모방(mimes)”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처럼(Meijer and Prins 1998:279), 수행성의 토대로서 육체를 말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관습이다. 버틀러는 주장한다. “존재론적 주장은 그것의 대상을 결코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오히려 “‘있다(there is)’는 제스처는 이것이 포착할 수 없는 지시체를 향한다. 왜냐하면 지시체는 완전히 언어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언어적 효과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적 효과 바깥에서 지시체에 접속할 수는 없지만, 언어적 효과는 그것이 포착하는데 실패하는 지시체와 같지는 않다”(Meijer and Prins 1998:279). 즉 ‘육체’란 특정 시점에서 언어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지만 영원히 탈맥락화, 재맥락화될 수 있는 지시체(실재; 최종적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 자체의 스타일(현상)은 무한히 반복적으로 해석(재의미화)가능한 현상으로서 미래의 해석(재맥락화)에 열려있다. 현상학에서 현상은 본질을 내포하는, 대당 관계 속에서 규정되지 않는다. 현상은 언제나 해석자에게 더 많은 의미를 제공한다. 따라서 현상으로서 육체적 행위는 과거의 해석(의미부여)에 제약되지 않고 미래의 수행적 효과에서 (잠정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참고문헌

    Adkins, L., & Skeggs, B. (Eds.). (2004). Feminism after bourdieu (pp. 191-210). Oxford: Blackwell.

    Boucher, Geoff. 2006. “The politics of performativity: A critique of Judith Butler.” Parrhesia: a journal of critical philosophy 1:112-141.

    Bourdieu. 1977. R. Nice Trans. 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Bourdieu. 1981. Men and machines. In K. Knorr-Cetina & A. V. Cicourel (Eds.),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 Toward an Integration of Micro- and Macro-Sociologies (pp. 304-317). London and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 1990. The Logic of Practice, trans. R. Nice. Cambridge, UK: Polity Press.
    ------. 1990a. In Other Words: Essays Toward a Reflexive Sociology, trans. M. 

     

    Butler. 1999. Gender Trouble.

    주디스 버틀러 ,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2016.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자음과모음. 

     

    Adamson.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 1991. Language and Symbolic Power, trans. G. Raymond and M. Adamson, 

    edited and introduced by John B. Thompson. Cambridge, UK: Polity Press. 

    〈국역: 피에르 부르디외(2014).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 1993. Sociology in Question, trans. R. Nice. London: Sage. 

    〈국역: 피에르 부르디외(2004). 『사회학의 문제들』. 신미경 옮김. 동문선.〉
    ------. 1998. “The scholastic point of view.” in Bourdieu, P. Practical Reason. 

    Cambridge: Polity Press, 127-40.

     

    Bourdieu. 2000. R. Nice. Trans. Pascalian Meditations. Stanford University Press.

     

    Jagger, G. (2012). “Embodied subjectivity, power and resistance: Bourdieu and butler on the problem of determinism.” In Embodied Selves (pp. 209-229). Palgrave Macmillan, London.

     

    Nentwich, J. C., Ozbilgin, M. F., & Tatli, A. (2015). Change agency as performance and embeddedness: Exploring the possibilities and limits of Butler and Bourdieu. Culture and Organization, 21(3), 235-250.

     

    Lovell, T. (2000). Thinking feminism with and against Bourdieu. Feminist theory, 1(1), 11-32.

    Samuel, Chris. "Symbolic violence and collective identity: Pierre Bourdieu and the ethics of resistance." Social Movement Studies 12.4 (2013): 397-413.

     

    Susen, Simon. 2013 "Introduction: Bourdieu and language." Social Epistemology: A Journal of Knowledge, Culture, and Policy, 27(3-4), 195-198.

     

    Susen, Simon. 2013. “Bourdieusian reflections on language: Unavoidable conditions of the real speech situation.” Social Epistemology: A Journal of Knowledge, Culture, 

    and Policy, 27(3-4), 199-246.

    Thompson, John B. 1984. “Symbolic violence: language and power in the writings of Pierre Bourdieu.” in 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 Univ of California Press, 42-72.
    ------. 1991. “Editor’s introduction.” in Bourdieu(1991), 1-31. 

    〈「존 B. 톰슨의 해제」, in 부르디외(2014), 407-52.〉

    Fogle, Nikolaus and Georg Theine. 2017. “The ‘Ontological Complicity’ of Habitus and Field: Bourdieu as an Externalist (RE-REVISED)” In Duncan Pritchard, Orestis Palermos, Adam Carter eds. Socially Extended Epistemology. Oxford University.

     

    조현준. 2016. 젠더는 패러디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현암사.

     

    Bernasconi-Kohn 2007

     

    Bourdieu. (1979). Algeria 1960: The Disenchantment of the World, the Sense of Honor, the Kabyle House or the World Revers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________. (1977/1995). 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

    ________. (1990a). In Other Words.

    ________. (1990b). Logic of Practice.

     

    Butler, Judith. 1986. “Sex and Gender in Simone de Beauvoir’s Second Sex”, Yale French Studies, 72: 35-49.
    Butler, Judith. 1988.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Theatre journal 40(4): 519-531.
    Butler, Judith. 1989. “Gendering the Body: Beauvoir’s Philosophical Contribution”, in Ann Garry and Marilyn Pearsall (eds), Women, Knowledge, and Reality: Explorations in Feminist Philosophy. pp. 252-62.
    Butler, Judith. 1999[1990]. Gender Trouble. Routledge. <2006. 『젠더트러블』. 조현준 역. 문학동네 >
    Butler, Judith. 1993.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 of “Sex.” New York: Routledge. 

    18/20 

    Butler, Judith. 1994. “Gender as Performance: An Interview with Judith Butler.” Radical Philosophy: A Journal of Socialist and Feminist Philosophy 67:32-9. (reprint: 1996. “Gender as Performance.” in P. Osborne (ed.). A Critical sense: Interview with intellectuals. London: Routledge.)
    Butler, Judith. 1998. “How bodies come to matter: An Interview with Judith Butler.” Signs 23(2):275-286. Butler, Judith. 2009. “Performativity, Precarity, and Sexual Politics”, Revista de Antropología Iberoamericana. 4(3): i-xiii. 

     

    Lloyd, Moya. 2015. “Performativity and performance.” in Disch, L. and Hawkesworth, M. (eds.) The Oxford Handbook of Feminist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 572-592.

     

    Rothenberg, M. A. (2010). The excessive subject: A new theory of social change. Polity.

    Salih, Sara. 2002. “Chapter 3: On Judith Butler and Performativity.” Sexualities and Communication in Everyday Life. pp. 55-68.

    Salih, Sara 

    Snook, Ivan. (1990) Language, Truth and Power: Bourdieu’s Ministerium. Edited by Ricahrd Harker, 

    Stern, David. G. (2003). The practical turn. The Blackwell guide to the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185-206.

     

    Cheleen Mahar and Chris Wilkes. An Introduction to the Work of Pierre Bourdieu: the Practice of Theory. UK: Palgrave Macmillan. 160-179.

     

     

    댓글

Designed by Tistory.